할아버지가 손녀들 손가락 자른 까닭.. 이게 사랑일까?

전미경 2022. 1. 2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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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월요일이 사라졌다>

[전미경 기자]

나는 영화 <월요일이 사라졌다>를 자아 찾기 SF 액션이 아닌 남자에 미쳐 가족을 배신한 여자 이야기로 정의하고 싶다. 자아 실현을 위해 일상적인 삶의 모든 균형을 깨트린 시작점이 바로 남자, 사랑이며 <월요일이 사라졌다>의 영화 제목과 일맥상통하는 월요일이 사라진 이유 역시 남자, 사랑이기 때문이다. 

<월요일이 사라졌다> 포스터 와 제목에서 주는 느낌은 상당히 배반적이다. 출근하기 싫어하는 월요병 직장인을 그린 오피스 영화라는 오인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월요일'은 사람 이름이다. 그러니까, 사람 '월요일'이 사라진 것이다.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영화는 그 호기심을 끝까지 충족시키며 몰입도를 선사한다. 장르는 독특한 소재의 SF 액션 스릴러.

1인 1가구 산아제한법으로 인구 증가를 통제하는 사회

출산 인구 과잉으로 식량이 부족해진 미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1가구 1자녀라는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시행한다. 오로지 한 가구에서 한 자녀만을 키울 수 있으며 나머지 자녀는 강제로 끌려가 냉동인간이 되어 훗날을 기약한다.

그런 엄격한 사회에서 무려 일곱 쌍둥이가 태어난다. 정부에서 알게 되면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명은 모두 끌려가 냉동인간이 되어야 한다. 일곱 쌍둥이의 외할아버지는 일곱 쌍둥이에게 '월 화 수 목 금 토 일'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몰래 키우기로 결심한다. 일곱 쌍둥이는 외할아버지의 통제 아래 오로지 자신의 이름을 가진 요일에만 외출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린다. 그리고 밖에선 '카렌셋맨'이라는 하나의 신분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외출했던 '목요일'이 스케이트를 타다 손가락이 잘려서 돌아오자, 외할아버지는 다른 여섯 명도 '목요일'과 똑같이 만들기 위해 손가락을 절단한다. 어린 쌍둥이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클로즈업되고 망설임 없이 행해지는 외할아버지의 난도 장면은 끔찍하다 못해 처절하다. 지키기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모습이 과연 정당한가 싶기도 하다. 어린 일곱 쌍둥이들은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하나로 동일시되어 움직였다. 개인의 사생활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게 자율을 포기한 체 30여 년을 살아간다. 성인이 된 후의 세상은 여전히 통제된 사회로 암울하다.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다

은행원인 일곱 쌍둥이 '카렌셋맨'. 직장은 물론 밖에서의 모든 일과를 공유하며 세상을 완벽히 속이며 운명공동체로 살아간다. 비록 밖에서는 하나의 신분으로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만 집에서 만큼은 개성과 취향에 따라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제한된 공간 안에서만 자유가 있는 것이다. 개성 강한 7명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장면은 역설적이게도 애처로워 보인다.

일곱 쌍둥이를 연기한 한 명의 배우 누미 라파스의 연기는 동일인인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다. 일곱 쌍둥이를 구분할 수 있는 건 개성 넘치는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이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만의 정해진 방식으로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나름 모두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지만 목요일은 자신이 아닌 카렌 셋맨이라는 하나의 가면으로 살아가는 것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했던 월요일이 돌아오지 않는다. 월요일이 사라진 것이다. 마침내 영화의 제목이 시작되는 이때, 영화의 긴장감이 최고조로 이른다. 이제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전반부 스토리가 일곱 쌍둥이들의 서사였다면 후반부는 액션과 모험 스릴러라는 복합작 장르를 넘나들면서 분위기는 180도 달라진다. 

공동운명체 중 한 명인 월요일이 사라지면서 팽팽했던 균형이 깨지고 남은 쌍둥이들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쌍둥이의 존재를 알게 된 정부와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평온했던 삶이 무너지고 월요일의 행방을 찾기 위한 그녀들의 핏빛 사투가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쌍둥이들이 하나둘 죽어나가고 정부 조직원 중 한 남자 애드리안이 월요일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애드리안은 쌍둥이들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월요일의 집을 찾는다. 그러나 토요일은 애드리안을 유혹해 정부 조직 서버에 접속하며 실마리를 풀어간다. 정부 조직원들이 쌍둥이들을 추격하면서 토요일은 죽음을 맞이하고 그 사실을 목격한 애드리안은 비로소 그녀들이  쌍둥이였음을 인지한다.

조직원들의 추격으로 쌍둥이들의 희생은 점점 늘고 홀로 남은 목요일은 애드리안의 도움으로 정부 조직 내부에 침투하는 데 성공한다. 목요일은 그곳에서 월요일을 보게 된다. 월요일은 자신만의 신분을 찾기 위해 정부 책임자 케이먼 박사에게 거래를 제안했고 정치 자금이 필요했던 케이먼은 월요일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더구나 박사 케이먼은 아이들을 냉동시킨 게 아니라 죽이고 있었다.

월요일이 정체된 자아를 위해 혼자만의 신분을 찾으려는 이유는 바로 남자 애드리안 때문이었다. 애드리안을 만나면서 사랑에 빠졌고 임신을 하게 되자 유일한 혈육인 자매들을 배신한 것이다. 그녀들의 삶을 무너뜨린 것은 결국 남자 애드리안이었다. 사랑을 이길 수 있는 본능적 이성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특히 이성과의 사랑은 모든 감성을 마비시키고 이기적인 욕망을 불러오기도 한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은 사랑으로부터 촉발된다. 통제된 자아 속에 답답하고 숨 막혔을 월요일의 자아를 폭발시킨 건 사랑이었다. 사랑한 대가는 가혹했다. 자매의 배신에 미쳐버린 일곱 쌍둥이는 자멸했고 목요일만 남겨진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희생시켜야 한다면 과연 그것이 정당하다 할 수 있을까. 그 모든 것이 숭고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해도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폭발적인 인구로 정부를 지키기 위해 어린이들을 냉동이 아닌 죽음을 가했던 케이먼  박사도 나라를 사랑했던 것이고, 쌍둥이들을 지키기 위해 다른 쌍둥이들의 손가락을 잘랐던 외할아버지도 자매들을 사랑했던 것일까. 자신의 남자를 지키기 위해 자매들을 배신했던 월요일 역시 이를 정당화 할 것이다. 

출산 장려를 위해 지원하고 있는 현 우리나라와는 맞지 않지만, 그럴듯한 스토리로 많은 질문을 던지게 했던 영화였다. 목적을 위해 수단이 정당화되는 충분 조건을 갖춘 사랑이란 전제가 굉장히 이기적인 것임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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