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착한 한국인, 왜 방역패스에 저항할까

태원준 2022. 1. 21.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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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접종률 95% 사회에서
불거져 나온 방역패스 저항
백신 거부감이 주된 원인인
美·유럽과는 전혀 다른 현상

자녀 안전과 교육에 민감한
한국 부모들의 공통된 심리
불공정과 차별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예민한 거부감

보편적 정서 고려하지 않고
투박하게 설계된 방역패스
정부가 국민을 너무 몰랐다

코로나 사태에서 한국인만큼 정부의 방역지침을 잘 따라준 국민은 없었다. 마스크를 쓰라면 썼고, 모이지 말라면 약속을 접었고, 장사하지 말라면 가게를 닫았다. 백신도 앞선 나라들을 죄다 추월하며 단기간에 높은 접종률을 달성했다. 그러다 방역패스 대목에서 마침내 저항이 터져 나왔다. 반발의 강도는 생각보다 컸다. 법원도 그 논리를 받아들였고 정부는 지침을 완화하며 물러서야 했다. 왜 방역패스였을까. 러닝머신에서 뛰지 말라, 운동하고 샤워하지 말라는 황당한 지침까지 순응하던 사람들이 왜 방역패스는 정부의 완고한 입장에도 따라주지 않은 것일까.

너무 오래 시달리니 지쳐서? 일상회복에 미흡했던 정부가 미덥지 않아서? 마스크, 모임 제한, 영업 제한, QR체크인 등 나머지 수칙은 여전히 잘 지켜지고 있다. 지난 2년간 한국인이 거칠게 반발한 조치는 방역패스가 거의 유일했다. 개인의 자유를 너그럽게 희생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방역패스 논란과 함께 자유와 기본권을 외치는 목소리가 부쩍 커졌다. 방역패스에 어떤 방아쇠가 담겨 있었지 싶다. 한국인이 인내를 철회하게 만드는 레드라인. 무엇이었을까.

방역패스 저항은 아이들에게 백신을 맞히는 문제로 촉발됐다. 정부가 초·중·고생의 접종을 사실상 강제하려 들자 부모들은 아이가 맞아도 안전할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부모들은 대부분 백신을 맞은 사람들이었다. 당시 성인 접종률은 90%를 훌쩍 넘긴 상태였다. 그동안 성인이 주로 맞았으니 부작용 피해 사례도 전부 성인이었다. 동년배 접종자가 후유증에 시달리고 목숨까지 잃는 것을 보면서도 백신을 맞았던 부모들이 자녀에게는 맞히지 않으려 했다. “나는 위험을 감수하지만 내 아이에겐 그럴 수 없다.” 방역패스가 가장 먼저 건드린 것은 이 부분이었다.

정부는 청소년 방역패스를 교육과 연계했다. 백신을 안 맞으면 학원과 독서실을 다닐 수 없게 했다. 한국의 교육열을 감안할 때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는 가장 치명적이기도 한 양날의 칼이었다. 우리나라 교육열이 높은 것은 교육이 자녀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생이 걸린 교육에 어떤 형태로든 불이익이 초래된다? 이보다 참기 힘든 불공정은 없다. 조국 사태에서 보지 않았나. 한국인이 그토록 분노했던 그 일도 결국 자녀 문제였고 교육 문제였다.

이렇게 아이들의 일로 시작된 방역패스 저항은 성인에게로 확산됐다. 백신 미접종자는 17종 시설 출입이 제한됐다. 일상생활과 밀접한 대형마트를 두고 저항이 거셌다. 자유를 제한하고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소송이 이어졌다. 사실 자유의 제한은 4명, 6명 하면서 모임인원까지 지정하는 것이 더 지나치다. 기본권 침해는 개인의 동선을 낱낱이 수집해가는 QR체크인이 더 과도하다. 그런 걸 잘 참던 이들이 방역패스에 못 견뎌하는 까닭. 나는 갈라치기와 차별에 있다고 생각한다. 모임 제한은 누구나 해당되지만 방역패스는 접종-미접종을 나눠 한쪽에만 불편을 준다. 모두가 당하면 큰 불편도 함께 견디지만 차별적인 불편은 작아도 감내하기 어려워지는 심리를 방역패스가 자극했다.

이밖에도 여러 요인이 결부됐을 것이다. 정부는 백신 부작용을 사실상 개인 책임으로 돌렸다. 국민은 정부를 믿고 백신을 맞았는데 정부는 그 부작용이라는 국민의 말을 잘 믿으려 들지 않았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신뢰할 만한 당국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초기에는 정은경 청장이 그 역할을 했지만 언제부턴가 숟가락 얹는 정치적 목소리가 많아지며 힘을 잃었다. 국민이 수칙을 충실히 따라줘 가능했던 K방역의 성과를 정부가 지나치게 독점하려 들었다. 정권 홍보에 너무 많이 동원된 탓에 정권교체론과 함께 방역 거부감도 커졌다.

착한 한국인의 방역패스 저항을 보며 떠오른 원인은 대략 이랬다. 분명한 것은 미국 유럽의 백신패스 저항과 전혀 다른 현상이란 점이다. 한국인의 저항에서 백신 거부감은 키워드일 수 없다. 접종률이 95%(성인) 85%(전체)인데 거부감을 논하는 건 난센스 아닌가. 그것은 자녀와 교육의 문제였고, 공정과 차별의 문제였다. 그동안 우리가 예민하게 반응하고 분노했던 여러 사안의 키워드와 다르지 않다. 방역패스는 공감대가 필요했다. 사회적 합의도 협상이고, 협상은 상대를 알아야 성사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부는 아직도 우리를 잘 모르는 것 같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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