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사과 따위 개나 줘버리는 인간들

2022. 1. 21.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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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사업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내용증명’이란 걸 받았다. 발신인은 얼마 전 부도 난 인쇄소로부터 재산에 대한 관리를 넘겨받은 파산관재인 변호사였다. 내용은 간단했다. 파산 선고 이후에 파악해 보니 외상매출금이 있던데 이걸 빨리 갚든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구체적인 사유를 적은 문서를 12월 30일까지 보내라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문득 성악을 공부한다는 소녀로부터 받은 생애 첫 연애편지가 떠올랐다. 그때도 이토록 격렬하게 가슴이 뛰지 않았던가. 30일이면 시간이 얼마 없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한숨이 나왔다.

그 인쇄소와 인연을 맺은 건 2007년 무렵으로 작년까지 매년 3만 부가 넘는 도서의 제작을 맡겼다. 제작비는 다음 달에 결제하되 편의상 백만원 단위로 지불하고 나머지를 이월하다가 2021년부터는 전액을 지불해 왔다. 코로나로 인한 마케팅 활동의 둔화와 번아웃 등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쇄 부수가 감소해 외상매출금을 남기기가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사고가 발생했다. 인쇄소 사장의 임금 체불로 직원들이 파업해 인쇄기가 멈춘 것이다. 하지만 납품받기로 한 당일 아침까지 상황을 전혀 몰랐다. 완전군장으로 온종일 올랐던 한겨울 설산의 정상에서 소대장으로부터 “이 산이 아닌가 보다”라는 황당한 말을 들었을 때와 맞먹을 정도의 충격을 받은 나는, 부랴부랴 다른 인쇄소에 연락해 작업을 마쳤지만 적잖은 비용과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그러나 피해 보상은커녕 사과조차 없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나. 주위에 물어보니 실로 다양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 나이에 내용증명을 처음 받았다고? 자네 정말 시시한 인생을 살아왔구먼”이라는, 사람의 의욕을 떨어뜨리는 데 매우 능숙한 직장상사 같은 발언부터 별거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격려, 어쨌거나 힘내라는 응원. 그중에서도 겨울 산행의 든든한 동반자인 컵라면처럼 실속 있는 조언을 해준 사람은, 3년 전부터 꾸준히 나가던 독서 모임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친해진 변호사였다. 내가 해준 얘기를 듣고 자료를 살펴본 그는 이것저것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이를테면 내용증명이란 훗날 소송에 대비하여 언제 어떻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는지 공적으로 증명하는 기능을 수행하지만 한편으로 상대방이 심리적 압박을 받도록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는 것. 우체국에서 보낼 수 있는데 요즘에는 인터넷으로도 가능하다는 것. 설령 상대가 제시한 날짜가 지나더라도 답변이 늦어질 수 있음을 알린 후 충분히 준비하여 답신해도 된다는 것. 해당 인쇄소의 부채 규모를 감안하면 계산서가 누락됐을 수 있다는 것 등이다. 파산 선고일의 날짜를 볼 때 북스피어의 신간 제작 전에 이미 인쇄소에서는 파산을 결정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지적해 주었다.

나는 그의 조언에 따라 내용증명을 쓰기로 했다. 이런 글은 간단한 식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금융위기에 따른 조세정책의 개편 방향을 모색하는 내용이 풍성하게 들어가는 것도 아닌 마당에, A4용지 두 장을 채우는 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헛되지 않아 해가 바뀌고 며칠 지나서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파산관재인 변호사였다. “내용증명을 굉장히 잘 쓰셨네요”라고 그는 말했다. 전후 사정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면서. 자신은 법적 대리인일 뿐이니까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얽힌 회사들이 워낙 많은 터라 마무리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로써 연말부터 했던 마음고생은 일단락되었다고 여겨도 무방할 듯싶었다. 다행이다. 이런 전전긍긍은 앞으로 사양하고 싶지만 무슨 엿장수도 아닌데 세상일이 뜻대로 될 리가 있나.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고도 사과 따윈 개에게나 줘버리는 인간들과는 언제든 맞닥뜨릴 수 있으니 내용증명을 작성하기 위한 글쓰기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는 새해 첫 다짐을 해본다. 독서 모임에도 열심히 나가야지.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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