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연작 4편.. 여행에 대해 은희경이 말하고 싶은 것들
은희경 지음
문학동네, 256쪽, 1만5000원
은희경의 소설을 계속 읽을 수 있다는 건 다행이다.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흠뻑 느끼게 해준다. 은희경은 30년 가까이 소설을 써온 60대 초반의 작가지만 여전히 젊다. 이번에 출간된 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의 표제작은 제29회 오영수문학상 수상작인데 “‘타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인간관계를 둘러싼 근원적 문제를 작가 특유의 개성적이며 상큼한 어법으로 형상화했다”는 평을 받았다. 중견작가에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상큼한 어법”이란 말이 은희경에겐 허용된다.
은희경 소설의 젊음은 관성이나 무거움, 독선을 끝없이 털어내며 벼려온 경쾌하고 이지적인 문장 때문이기도 하고 인물과 감각, 묘사의 현대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그리는 인물들은 고독하고 서투른 개인들이며, 낯선 세계를 조심스럽게 접촉한다. 은희경은 극적인 서사에 기대지 않고 일상에서 삶의 비밀과 낯선 감각을 발견해낸다. ‘작가의 말’에서 그는 “나는 소설 속 인물들이 위축되고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스스로를 방치하지 않으며 타인에게 공감하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이번 소설집은 은희경의 열다섯 번째 책이다. 수록된 네 편의 단편은 2020년과 2021년에 문학잡지에 발표했던 것으로 모두 미국 뉴욕 여행을 다뤘다는 점에서 ‘뉴욕 4부작’으로 묶인다. 은희경은 뉴욕에 사는 친구가 있어 12년간 그 도시를 드나들었고 그 시간이 이번 소설에 담겼다고 말했다. 은희경은 뉴욕이라는 배경을 관계에 대한 탐구, 자신을 들여다보는 새로운 창, 여행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로 사용한다.
뉴욕은 실제의 도시지만 하나의 기호이기도 하다.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마음속에서 뭔가 서걱거리며 불편할 때 사람들은 여행이라는 탈출을 꿈꾼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 뉴욕이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에 나오는 수진도 이혼 후 40대의 나이에 홀로 뉴욕을 찾아왔다.
“사실 수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뿐 아니라 자신에게서도 도망치고 싶었는지 모른다.… 수진은 이곳으로 떠나오며 그녀를 규정하는 나이와 삶의 이력에서 잠시나마 이탈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의 승아도 삶에 시달리다 충동적으로 친구가 사는 뉴욕으로 떠난다. “영화와 사진 속에서 그 도시는 언제나 빌딩이나 공원에 둘러싸여 있었다.”
뉴욕에 도착한다고 행복이 짠하고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여행을 떠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삶에 여행을 끼워 넣는다고 해서 드라마나 화보가 되진 않는다.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에서 한껏 기대를 갖고 뉴욕에 온 승아는 거기 사는 친구 민영의 삶을 보고 놀란다. 낡고 오래된 집, 빠듯한 생활, 불편한 감정들, 거리 곳곳에서 마주치는 인종 차별적 시선들….
‘장미의 이름은 장미’에서는 현지 어학원에서 만난 세네갈 출신 흑인 대학생 마마두가 느끼는 고립감이 인상적으로 묘사된다. ‘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의 현주는 현지에서 사귄 한국계 남자친구와 연애에서 삐걱거린다.
기대했던 해방은 없다. 환대는 어려운 것이다. ‘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관광객은 열린 문밖에 선 채로 피상적인 환대를 받는다.” 이 피상성이야말로 여행의 본질에 가깝다.
승아는 뉴욕에 와서도 정작 맨해튼을 보지 못했다. “근데 저기 건너편은 어디니.” 승아가 묻자 민영이 대답한다. “맨해튼. 여기에서 보아야 한눈에 볼 수 있어. 가까이 가면 너무 크니까.”
소설 속 인물들은 고독하고 관계는 자꾸 어긋난다. 낯선 도시와 타인들 속에 자신을 두는 것이 의미가 있다면, 거기서 다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일지 모른다. ‘아가씨 유정도 하지’는 그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뉴욕 문학행사에 초청받은 50대 작가는 80대 어머니의 이례적인 동행 요청을 받고 함께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에서 작가는 어머니의 비밀을 만난다. 그때 어머니는 이전까지 알던 어머니와 다른 사람으로 다가온다.
‘왜, 얼마 동안, 어디에’는 입국 심사대에서 받게 되는 질문이다. 소설 속 승아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를 잘 생각해봐”라고 친구에게 말한다. “거기에 대답만 잘하면 문을 통과할 수 있어.”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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