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류 산업 급성장 '빅블러' 시대.."로봇 선점해야 생존" 총성 없는 전쟁
재계가 앞다퉈 로봇 산업에 뛰어들고 있다. 직접 기술 개발보다는 전략적 지분 투자로 시너지를 노리는 기업이 다수다. 이전까지 로봇 산업은 산업용 로봇을 중심으로 성장해왔으나 모빌리티 산업의 본격적인 개화로 지능형·서비스 로봇 산업이 폭발적인 성장을 보일 전망이다.
▶로봇 선점 속도전
▷삼성·LG, 줄줄이 지분 투자
재계 주요 기업은 로봇 산업에 대한 전략적 지분 투자와 함께 기술 역량 내재화에 힘을 쏟는 모습이다. 신기술의 경우 원천 기술의 ABC를 자체 역량만으로 개발하기에는 리스크가 높다. 이 때문에 기업이 신성장동력을 확보하거나 신시장에 진출하는 전략적 수단 중 하나가 바로 인수합병(M&A)이다. 특정 사업이나 기술 역량을 보유한 기업을 품으면 시장 진입이 한결 수월하고 오랜 연구개발을 거치지 않아도 돼 핵심 기술 내재화에 소요되는 시간,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가령, 대기업이 기술 기반 스타트업에 소규모 지분 투자를 단행한 뒤 기술, 제품 개발 과정을 지켜보다 전략적 확신을 갖고 추가적인 지분 투자 혹은 M&A로 성장 기반을 다지는 식이다. 이때 대기업의 내부 연구개발 역량을 함께 키우면 외부 기술을 흡수하고 이를 내재화하는 데 더욱 효율적이라는 것이 전문가 진단이다.
로봇 산업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현대차그룹이다. 현대차그룹은 로봇 부문을 자동차·UAM과 함께 3대 성장동력으로 키워나가는 중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정의선 회장이 사재를 털어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했고 사내에서도 로보틱스랩을 통해 자체 연구개발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2018년 신설한 로보틱스팀을 2019년에는 핵심 기술 개발을 총괄할 ‘로보틱스랩’으로 확대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조직 개편을 통해 기존 로봇사업화 태스크포스를 로봇사업팀으로 격상시켰다. 이전에는 CES 등 국제 무대에서 연구 단계 로봇 기술을 소개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상설 조직으로 전환한 만큼 로봇 사업에서 실제 수익을 내겠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아직 구체적인 사업 계획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 복귀한 만큼 로봇 분야에서 빅딜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하다.
LG전자는 단순 지분 투자에 그치지 않고 2017년 SG로보틱스, 2018년 로보스타 등 로봇 기업을 잇달아 인수했다. 지난해 7월에는 자율주행 로봇 ‘LG 클로이 서브봇’을 정식 출시해 주목받았다. LG전자 역시 기술 역량 고도화를 위해 비즈니스솔루션사업본부 내 로봇센터와 최고기술책임자(CTO) 산하에 로봇선행연구소 등의 전담 조직을 뒀다.
두산그룹도 로봇 사업을 주목한다. 두산로보틱스는 지난해 말 국내 최초로 협동 로봇 연간 판매량 1000대를 돌파했다. 두산은 그룹 차원에서 전사적으로 로봇 산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은 최근 신년사에서 신사업과 관련 “협동 로봇·수소 드론·물류 자동화 솔루션 부문 등이 성장 가도에 올라설 때”라고 강조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현대로보틱스를 중심으로 로봇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현대로보틱스는 1984년 현대중공업 로봇 사업 부문에서 시작해 40년 가까이 산업용 로봇을 개발해왔다. KT는 현대로보틱스에 500억원을 투자해 10%에 해당하는 지분을 취득하면서 로봇 사업에 진출했다.
▶연관 기술 활용성 높아
▷물류·모빌리티 고속 성장
재계 주요 기술 기반 기업이 로봇 산업에 주목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분석된다. 과거에는 로봇이 산업용 B2B 시장에 국한됐으나 최근에는 시장 수요 증가로 기술 발전을 촉진하는 등 산업의 거시적인 특성 자체가 변화했다는 진단이다.
우선, 코로나19 국면에서 물류의 중요성이 커졌고 중국 등 개발도상국에서 인건비 상승이 로봇 수요를 촉진시켰다는 분석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인건비 급등, 인공지능(AI)과 5G, 자율주행 등 연관 기술 결합을 통한 성장 가능성 등을 로봇 산업 고성장 배경으로 꼽았다.특히 물류에서 자율주행 기술과 결합한 로봇의 주된 응용 분야는 라스트 마일(Last Mile) 단계가 될 전망이다. 물류는 크게 퍼스트 마일(First Mile)과 라스트 마일로 구분된다. 퍼스트 마일은 제조사가 제품을 물류 센터로 넘기는 단계를, 라스트 마일은 제품을 소비자에게 배달하는 마지막 접점을 뜻한다. BCG는 “맞춤형 제품의 신속 배송에 대한 소비자 수요는 물류 분야에서 로봇 역량 확대로 이어질 것”이라며 “중국 공장 노동자 임금이 2007년 이후 두 배, 인도는 같은 기간 50% 이상 오른 상황에서 로봇은 저임금, 저숙련 노동자를 대체하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빅블러’ 현상 가속화로 모빌리티 산업이 급성장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원인이다. 가령, 자동차 산업은 단순 차량 제조에서 이동 편의를 위한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통합 모빌리티 산업으로 확대, 재편 중이다. 결국 자동차 기업뿐 아니라 구글, 아마존 등 IT 공룡이 뛰어든 자율주행 기술의 종착점도 로봇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리서치본부장은 “소비자로 향하는 최종 배송까지의 무인화가 불가능하다면 자율주행 차량 용도가 상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업체들로 하여금 로봇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한 것”이라며 “현대차, 콘티넨탈, 네이버랩스 등의 CES 전시를 보면 라스트 마일까지 무인화의 연속성에 대한 고민이 묻어난다는 점을 공통분모로 발견했다”고 진단했다.
▶지능형·서비스 로봇이 주인공
▷초기 시장 넘어 주류 시장 문턱
앞으로 로봇 산업은 지능형·서비스 로봇을 중심으로 고속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기업마다 로봇 관련 기술 업체에 전략적 투자를 서두를 것으로 보인다. 로봇 같은 신성장 산업은 스타트업 중심으로 생태계가 짜여 있어 지분 투자의 성패를 가르는 요인은 첫째도 둘째도 속도전이기 때문이다. 자칫 경쟁 기업에 투자의 기회를 뺏긴다면 후속 투자를 도모하기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경영학계에서는 앞으로 수년이 로봇 산업의 질적 성장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로 본다. 하이테크 마케팅 분야 대가인 제프리 무어 스탠퍼드대 교수의 기술 수용 주기에 따르면 신기술은 초창기 혁신가 수용, 얼리 어댑터 수용, 대중적인 확산과 수용 등의 단계별 과정을 거친다. 이때 새로운 기술은 초기 시장에서 주목받다 주류 시장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커다란 단절에 맞닥뜨리는데, 그는 이 시기를 ‘캐즘(chasm)’이라고 불렀다. 캐즘을 극복해야만 광범위한 시장으로 확대되는데 작금의 로봇 산업은 캐즘을 건너가는 길목에 놓여 있다는 것이 다수 전문가 견해다.
중장기적으로는 로봇 산업의 캐즘 구간이 대폭 짧아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 판단이다. 삼성, 현대차, LG 등 재계 주요 기업이 로봇 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삼아 관련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어서다. 재계의 활발한 투자로 로봇 산업은 혁신 수용가 집단을 중심으로 한 초기 시장 단계에서, 캐즘을 극복하고 실용성을 중시하는 주류 시장으로의 전환이 가속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제어로봇시스템학회장을 지낸 고광일 고영테크놀러지 대표는 “로봇 산업은 주류 시장으로 진화하기까지 2번 정도의 캐즘을 극복해야 하는 만큼 기술 수용 주기에 대해 잘 이해하고 단계별로 적합한 사업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43호 (2022.01.19~2022.01.2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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