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느림의 미학' 유희관 "편견과 싸워 온 나..악플 단 팬조차 감사했다" [일문일답]
(엑스포츠뉴스 잠실, 김현세 기자) 2009년부터 2021년까지 13년 동안 두산 베어스에서 구단 좌투수 프랜차이즈 최다승인 101승을 올린 유희관(36)이 은퇴한다. 그는 20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자신의 은퇴 기자회견을 통해 프로야구선수로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은퇴사
"너무 떨린다. 그동안 미디어데이도 해 봤기에 안 떨릴 줄 알았는데 떨린다. 내게 영광스러운 자리를 마련해 주신 구단주님을 비롯한 구단 프런트 분들께 감사하다. 입단할 때부터 많이 부족했는데…. 나를 아껴 준 많은 감독님께도 감사하다. 많이 부족한데도 지도해 주신 많은 코치님, 함께 땀흘리며 고생하고 가족보다 더 자주 보며 이 자리를 위해 달려 온 동료들에게도 고맙다. 마지막으로, 두산 팬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는 없었다. 잘할 때나 못할 때나 늘 응원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다. 질책도 해 주셨다.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은퇴사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렸다. 은퇴 실감이 났나.
"여기 오기 전까지 실감나지 않았다. 이곳에 와 보니 이제야 실감이 난다. 야구를 하루이틀 한 게 아니다. 인생의 3분의 2인 25년을 야구했다.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야구선수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참 열심히 했고 행복한 야구선수였다고 생각한다."
-'편견과 싸워 왔다'고 말했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수식어를 긍정적으로 봐 주지 않는 시선도 많았다.
"나를 대변할 수 있는 좋은 애칭이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것만으로 나를 대변할 수 있는 좋은 단어다. 나도 '이 느린 공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있었다. 주위에서도 '1, 2년 하다 말 것'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해 온 노력이 편견을 깨고 은퇴 기자회견을 하는 선수로 거듭난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언제 은퇴를 결심했나.
"사람이라면 항상 마지막을 생각한다. 어느 선수든 은퇴한다. 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왔다. 지난해 많이 부진했다. 2군에 가 있는 시간이 많았다. 1군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후배들이 뛰는 모습을 보며 '이제는 자리를 물려 줘도 되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후배들의 성장을 지켜 보며 뿌듯했다. 이제는 후배들이 명문 두산의 계보를 이어 나갈 수 있을 거다. 2군에서는 나를 많이 돌아 봤다. 많이 고심했다. 그때가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시기다."
-연봉 협상을 진행 중이었다고 알려졌다. 진로에 대해서는 어떻게 고민했나.
"구단과 연봉 문제로 은퇴하는 건 전혀 아니다. 확신이 사라졌던 게 사실이다. 예전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팀에는 좋은 투수들이 많이 성장하고 있다. 내가 방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좀 더 좋은 모습일 때 떠나서 자리를 물려 주는 게 맞다고 봤다."
"제2의 인생을 여러 방면으로 생각하고 있다. 많은 조언을 듣고 있다. 지금까지 못 만났던 분들을 뵈며 나아갈 방향을 조언듣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여러분께서 생각해 주시는 방향에 맞게 가려 한다. 나도 내 제2의 인생이 궁금하다."
-해설위원 제의도 받았나.
"말을 함부로 하기가…. 세 군데 다 받았다. 너무 감사한 일이다. 야구를 그만두면 막막할 줄 알았다. 해야 할 일이 없으니까. 야구장에 출근하지 않는 것만으로 막막할 것 같았는데, 나를 찾아 주신 분이 많았다. 감사했다. 해설위원이 될지, 방송을 할지, 코치가 될지 아직 모른다. 무슨 일이든 내게 주어지면 열심히 할 생각이다. 방송 쪽에서도 연락이 많이 왔던 거로 기억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프로 첫 승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직도 못 잊는 2013년 5월이다. 니퍼트의 대체 선수로 등판했다. 그 1이라는 숫자가 있었기에 101이라는 숫자도 있다."
"가장 기뻤던 순간은 2015년에 프로 입단 후 첫 우승이다."
-구단 역대 최다 109승을 깨고 싶어했다.
"솔직히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기록을 의식하고 야구한 건 아니다. 하지만 목표 의식으로는 늘 다가 왔다.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깨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 유니폼을 벗게 됐다. 나보다 뛰어난 후배들이 내 기록뿐 아니라 장호연 선배님의 기록도 깰 수 있을 거다. 그래야만 발전할 수 있다. 우리 팀에서 앞으로 계속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야구 외에도 여러 종목에 능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야구 빼고 다 할 것 같다. (웃음) 다른 운동을 하더라도 야구는 잘했을 것 같다. 구기 종목은 다 잘했다. 딱히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다른 종목에서 뛰지 않을까?"
"너무 쉼 없이 달려 왔기 때문에 야구는 마음 속에 담아 두려 한다."
-국가대표팀에 뽑히지 못해 아쉽지 않았나.
"대회에 나갔더라면 잘했을 거라는 자신은 있었다. 내 공이 느리기에 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셨겠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부족했다고 본다. 이제는 다른 분야에서 대표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은퇴를 선언한 뒤로 팬들에게도 메시지를 많이 받았다고.
"악플 말고 선플을 받아 본 게 오랜만이었다. 모두 '그동안 감사했다', '다시는 그라운드에서 못 본다'는 말이 마음을 울렸다. SNS에도 일일이 댓글을 달아드렸다. 너무 감사했기 때문에. 팬이 안 계시면 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내 주신 글들을 보며 울컥했다. 슬펐다."
-'나를 미워한 팬들에게도 고맙다'고 했었다.
"악플보다 무서운 게 무플이다. 하나의 관심이라고 생각했다. 당사자는 속이 상하지만 돌이켜 보면 내게 애정이 있었기에 그렇게 말씀해 주신 거다. 그런 분들조차도 감사했다. 어떻게 보면 내 팬이 아니어도 넓게 보면 야구 팬이다. 야구 팬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항상 그렇게 생각해 왔다."
-은퇴 선언한 뒤 누가 가장 슬퍼했나.
"동료들에게 미안한데, 투수조장으로 있으면서 잔소리를 많이 했다. 많이 모질었다. 모두 연락했다. 함께한 (김)현수, (양)의지, (이)원석이 등 많이 연락해 줬다. 한편으로는 후배들에게 좋은 말을 좀 더 해 줬더라면 싶더라. 잘 챙겨 주지 못했을까. 따뜻한 말을 해 줬더라면 어땠을까. 지금 이 자리를 빌려 내가 잔소리를 많이 해서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다."
-선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선배님들을 보면서 프로야구선수로서 보여야 할 모범에 대해 많이 배웠다. 선배님들이 안 계셨다면 나도 없었다. 두산만의 끈끈한 문화를 보고 배우며 나도 성장했다. 야구를 아무리 잘하더라도 팀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앞으로도 후배들이 명문 구단의 명성을 이어 가 주면 좋겠다."
-은퇴 결심한 뒤 김태형 감독과 나눈 대화는?
"'너무 고생했다'고 하셨다. 감독님과 좋은 기억과 안 좋은 기억이 있지만 좋은 기억이 많다. 티격태격했지만 아들처럼 챙겨 주려 하셨다. 감독님께서 부임한 첫 해 우승했다. 계실 때 커리어 하이도 달성했다. 많이 아쉬워하셨다. '좀 더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셨다. 하지만' 앞으로 인생에서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란다'고 덕담해 주셨다."
-편견을 이겨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8년 연속 10승이다. 100승을 달성한 순간에도 편견을 조금은 깨지 않았을까. 그런데 나 혼자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뻔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돌이켜 보면 혼자 할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실지 몰라도 그들이 없었다면 은퇴 기자회견도, 웃으며 행복하게 야구 인생을 마칠 수도 없었을 거다."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나.
"그라운드에서 늘 유쾌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다른 의미로는 팬들을 가장 생각했던, 두산을 너무 사랑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더는 야구하지 못하고 은퇴하지만, 팬 여러분께서 후배들을 위해 두산을 사랑해 주시면 좋겠다. 또 두산뿐만 아니라 프로야구를 사랑해 주시면 좋겠다. 예전의 인기를 되찾을 수 있기를. 많은 사랑과 관심 부탁드린다."
사진=잠실, 박지영 기자
김현세 기자 kkachi@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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