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의 왕 4년 만에 연극 '리차드3세' 연기.. 황정민의 귀환
깊은 어둠 속 한 줄기 빛이 등받이가 기다란 왕좌를 비춘다. 이윽고 냉소적 어조를 띤 음흉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다. “불만의 겨울은 가고 태양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여름이 왔구나.” 그는 다름 아닌 절대적 악인 리차드3세(황정민). 등이 굽고 손과 발이 굽은 그는 히죽거리며 객석을 아우른다.
“날 봐. 좋은 핏줄로 태어났지만 거칠게 만들어졌지. 아무렇게나 찍어낸 듯 뒤틀린 모습. 나는 이 순간부터 훌륭한 배우가 되겠어. 때론 웃으면서 때론 동정의 눈물도 흘리면서 유쾌하게 엄격하게 사랑스럽게 또 마초적으로. 세상을 속일 명연기로도 내가 저 왕좌를 차지할 수 없다면, 그럼 조금 더, 더 악해지면 되겠지.”
그의 말처럼 리처드3세는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온갖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이다. “난 뒤틀린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듯, 나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악인을 자처한 리차드3세는 흉한 소문을 퍼뜨려 큰형 에드워드와 작은형 조지가 서로를 증오하게 만들고, 끝내 두 사람의 목숨을 잃게 한다. 그뿐 아니라 왕위 계승을 앞둔 조카 둘을 살해하는 참극을 벌인다. 또 자신이 죽여 남편을 잃은 여인(앤)에게 청혼해 왕비 자리에 앉힌 후 자신을 돋보이게 할 눈요깃감으로 삼기도 한다. 철저한 악인이다. 황정민은 “악행은 내가 저지르고 통탄할 책임은 남들에게 미루는 게 손쉬운 방법”이라며 “몇 백 년 전 사람들도 그걸 느끼고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고 전했다.
황정민이 리차드3세를 열연한 건 2018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 13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열린 연극 ‘리차드3세’ 프레스콜에서 황정민은 “연극학도일 때 선배들이 올린 고전극을 보고 자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클래식함의 위대함이 없어져서 안타까웠다”며 “우리가 연극을 좋아하는 집단이니 고전극을 해야 하지 않나, 싶었다. 이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어 “고전은 시적인 표현이 워낙 많아 자연스럽게 소화하기가 어렵다. 모든 단어의 자음과 단음을 잘 공부해야만 관객을 이해시킬 수 있다. 이게 쉬워보여도 굉장히 어렵다”며 “공부하기에 이만큼 좋은 작품이 없다. 개인적으로 그게 이 작품의 큰 매력”이라고 전했다.
저 많은 대사를 어떻게 다 외웠을까, 실제 장애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의 탄탄한 구성이 100분간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황정민의 연기가 관객을 압도하는 건 저마다의 마음에 지닌 악심일지 모른다. 철저한 악인이지만 나도 모르게 동화되고 이해되는 악. 서재형 연출가는 “리차드3세를 칭찬하지는 않지만 그 (악의) 동기는 타당하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일한만큼, 노력한 만큼 대우받아야 하지만, 왕위 계승권자임에도 불구하고 몸에 장애를 지녔다는 이유로 소외됐다는 게 이유다.
실존인물인 리차드3세는 사실 꼽추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극중에 꼽추로 나온 것에 관해 서재형 연출은 “사실보다 셰익스피어 작품에 충실했다. 그리고 도전을 좀 하고 싶었다. 셰익스피어 작품 서른 몇 편중에 이렇게 정리가 안 된 작품이 없다. 셰익스피어가 훌륭하긴 하지만 쓰려고 마음을 먹은 건지, 안 먹은 건지 헷갈릴 정도다. 방대하고 복잡해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작업을 하게 됐다”고 전했다.
엄청난 대사량과 다채로운 감정선을 연기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는지에 관한 질문에 황정민은 “대사는 배우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연습하면 자연스럽게 외워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땀이 많아 본래 빨간 얼굴이 더 빨갛게 변하는 게 어려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극의 시작과 끝. “그대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라는 미치광이 마가렛 왕비(정은혜)의 외침이 긴 여운을 남긴다. 마치 관개들에게 ‘당신은 리차드3세와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지은 죄는 없는가’라고 묻는 것처럼... 다수의 출연 배우도 이 대사를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로 손꼽았다. 그 외침은 2월13일까지 계속된다.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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