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자라는 것은 아이만이 아니다. 엄마도 자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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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키운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스케치북 두 권을 집으로 들고 왔다. 펼쳐 보니 아이 그림에는 그날그날 주제가 있었고, 그 안에는 어른 글씨가 함께 있었다. 아마도 선생님이 아이가 그림에 대해 말한 것을 차분히 들은 뒤 세세히 글로 남긴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나비는 지금 당근이 고소하다고 생각해요.” “엄마는 방에서 자고 있고 저는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고 있어요.” “저는 가족들과 프랑스에 가는 비행기를 타고 있어요. 비행기 아래는 지금 바다예요. 바닷속에는 돌고래들이 첨벙첨벙 헤엄치고 있어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서워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요.” “꽃이 아름답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서 기분이 좋아요.” 이런 식으로 아이의 생각을 빠짐없이 듣고 메모해 준 게 고맙게 느껴졌다. 스케치북이 집으로 도착하고 며칠 후 유치원에서 부모 교육 시간을 가지겠노라며 연락이 왔다. 참석 준비물은 아이가 일 년 동안 그린 두 권의 스케치북이었다. 아이의 그림 이야기로 아이의 발달 상태와 심리를 알 수 있다고 해서 큰 기대를 안고 교육에 참석했다. 입학 후 첫 대면 부모 교육이었다.
부모 교육을 주관한 원장 선생님은 아이의 그림 속에 누가 등장하는지, ‘나’ 자신이 그림 속에 꼭 등장하는지, 선생님이 말한 주제의 내용이 잘 들어 있는지. 자신이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아이의 그림에서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림 실력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아이가 그림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가 곧 마음 상태였다.
아이의 올해 그림 속 엄마는 주로 아파서 자고 있었고, 아빠는 요리하거나 친구들과 모험을 떠난 자신을 지켜보거나 기다리는 내용이 많았다. 지켜보거나 응원하는 모습으로 부모가 표현돼 있다는 것, 항상 곁에 있으며 의지가 돼준 친구 한 명이 모든 그림에 등장한 것은 다행이었다. 그런 한편 올 한 해 내내 둘째 출산 후 찾아온 산후풍으로 몸과 정신이 아팠던 나로서는 가슴이 뜨끔하고 눈시울이 붉어진 시간이기도 했다.
여름 초입부터 온몸이 시리거나 따갑거나 화끈거렸다. 가슴은 쉼 없이 두근거리고 불안하고 식은땀이 흘렀으며, 추웠다 더웠다를 수시로 반복했다. 머리에 베개만 닿으면 잠이 들던 내게 불면증이 찾아올 줄이야. 한방에서는 자율신경 실조형 산후풍, 양방에서는 섬유근육통,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불안 신체화라고 말했다. 대학병원 신경과에서는 중추신경계의 신경 신호등을 강제로 끄는 신경통 약만 처방해 주었는데 통증은 크게 완화되지 않고 부작용으로 불면증만 심해졌다. 그렇게 5개월이 흘렀고, 나는 하루 두 시간도 자지 못한 채 넉 달을 버텼다. 그때 내가 불안을 다스린 방법은 기도와 감사였다. 신이 모든 곳에 계실 수 없어서 어머니를 보냈다는데, 그런 어미가 아프면 어떡하나요. 그렇게 기도하다가 엄마 없는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며 오지랖을 넓혀 밤마다 조금씩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기부하기 시작했다. 너무 힘들 때, 행운이 내 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는 기도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신이시여, 남을 도울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그렇게 매일 기도하고 매일 조금씩 내 것을 나누며 아직 나눌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차츰 불면의 밤이 가라앉고 조금씩 잠을 잘 수 있게 됐으며, 통증은 차츰 가라앉았다. 오래 아팠던 탓에 마음에 옅게 남은 불안이 불편했지만 이 또한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노력하는 내 뿌리가 돼주고 있다. 그리고 극복해 낼 것이라 믿는다.
원장님은 이렇게도 말했다. “어떤 아이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막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요. 모든 사물이 바이러스가 무서워 마스크를 쓰고 있기도 해요. 이 시절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한 자존감을 지닌, 위기 상황과 불안을 잘 극복하는 롤 모델입니다. 즉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의 삶에 큰 배움의 기회로 다가갈 것입니다.”
자신을 되돌아보거나 살피는 시간이 더 많아진 시절이다. 이때 돌아보게 되는 것은 결국 자존감이다. 자존이란 역경을 경험하지 않고 본래 고유한 내 모습을 잘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존재와 치열하게 부딪히며 다름을 인정하고 고난을 이겨낸 후 보석 같은 나만의 것을 만들고 인정하며 다듬어가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나는 아이와 매일 감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뇌과학자의 말에 따르면 우리 뇌는 알고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른 것, 즉 인지부조화 상태를 싫어한다고 한다. 따라서 가짜 감사라도 계속 그 마음을 반복한다면 그것이 누적돼 뇌가 습관적으로 긍정적 사고를 하며 결국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 공포 등 부정적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은 감사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다. 모두에게 찾아온 시대적 불안함, 개인에게 닥친 어려운 상황이 당장 바뀌지 않아도 감사와 삶의 의미를 찾는 자는 반드시 살아남는다. 새해에는 나은이의 스케치북에 씩씩한 엄마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그림들이 가득해지길.
전지민 전 에코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그린 마인드〉 편집장. 강원도 춘천에서 두 아이와 산다. 여성이자 엄마로서 지속 가능한 삶을 고민하는 내용을 담은 〈육아가 한 편의 시라면 좋겠지만〉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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