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미사일 신공' 등극한 북한

채병건 2022. 1. 18.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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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어느 나라도 일주일이라는 초단시간에 미사일 기술을 발전시킬 수는 없다. 개인 차원의 시험도 당일치기로 성적을 올리기가 쉽지 않은데 정권 차원의 미사일 개발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북한이 불과 일주일 만에 미사일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는 속도전의 나라에 등극했다. 북한을 이같은 ‘미사일 신공’의 경지에 올려준 건 대한민국 군이다. 군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그렇다.

당초 북한이 이달 5일 쏜 미사일을 놓고 군은 “과장”으로 평가절하했다. 군의 발표는 다음과 같다.

「 정부 “극초음속미사일 주장 과장”
북이 다시 쏘자 ‘진전’이라 바꿔
‘왜란 없다’했던 통신사 떠올라
안보의 정치적 판단은 위험

“북한이 1월 6일 보도를 통해 주장하고 있는 극초음속미사일 발사 관련 사거리, 측면기동 등의 성능은 과장된 것으로 보이며, 특히 극초음속비행체 기술은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됨.”(1월 7일 설명 자료)

그러자 북한이 일주일 후인 11일 또 쐈다. 이번엔 군의 평가가 바뀌었다.

“최대속도는 마하 10 내외이며, 북한이 지난 1월 5일에 발사한 탄도미사일보다 진전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음.”(1월 11일 언론 공지)

군의 발표대로 하면 북한은 7일 만에 ‘과장’에서 ‘진전’으로 실력을 보여줬다. 군의 발표를 따라가니 이런 황당한 상황에 다다른다.

북한은 지난 1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극초음속미사일 시험발사를 진행해 ‘대성공’했다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2일 보도했다. [뉴스1]

사실 북한의 미사일 실력이 갑자기 늘었다기보다는 군의 ‘북한 과장’ 발표가 경솔했다는 게 더 상식적이다. 군사적 위협은 한차례의 발사에서 잘라낸 단면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하고, ‘기술적 축적’ 측면에서 진행형으로 평가하는 게 당연하다. 또 전례로 보면 북한은 미사일을 한 차례 쏘고 만족하는 정권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발사 하나를 놓고 북한의 뻥튀기로 일축한 건 위험했다. 특히 안보를 책임지며 군사적 위협에 가장 민감해야 할 군이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놓고 “과장된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으니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1998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북한은 대포동1호를 시험발사한 뒤 인공위성 광명성을 우주궤도에 쏘아 올렸다고 주장했지만 핵심 군 당국자들은 일제히 “인공위성은 거짓말이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위한 대포동1호를 시험발사했다”고 분노했다. 북한의 주장에 속으면 안 된다는 얘기였다. 당시나 지금이나 북한 주장을 믿지 말라는 데선 군의 발표가 동일한 데 어째 방향은 다르다.

우리는 북한을 우습게 보다가 뒤통수를 맞았던 경험이 있다. 2012년 태양절 열병식 때 등장했던 KN-08(화성-13형)을 놓고 ‘가짜’라는 주장이 곳곳에서 나왔다. 그 5년 후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을 시험 발사한 뒤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ICBM 핵미사일을 개발했다는 주장이었다. 북한이 98년 ‘인공위성 발사’로 가장했던 것의 목적지는 결국 ICBM이었다. 이젠 누구도 북한을 ‘짝퉁 미사일’로 국제사회를 협박하는 나라로 여기지 않는다.

군의 발표를 접하니 문득 왜란 전 일본 땅을 밟았던 통신사들이 떠오른다. 당시 조선으로 돌아온 정사 황윤길은 “필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는데, 부사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만일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라고 묻자 김성일은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 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이라고 해명했다.(『조선왕조실록』) 김성일은 이후 왜적이 침입하자 진주성 전투에 참전해 싸웠다. 왜군을 피해 도망친 비겁한 관료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왜적의 침입 징후를 제대로 알리지 않은 이로 역사에 남았다.

북한 극초음속 미사일을 ‘과장’으로 군이 일축한다고 해서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북한이 아직 완전한 단계의 극초음속 미사일 기술을 확보하고 있지 않다고해도 스커드 미사일, ICBM 위협은 그대로다. 설사 지금은 북한의 과포장 술수라 해도 5년 후에도 과포장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나는 ‘북한의 과장’이라는 군의 발표가 대선이라는 민감한 시점을 맞아 북한 변수가 등장하는 걸 우려한 정치적 판단 때문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군이 안보적 판단이 아닌 정치적 판단에 끌려가는 순간 나라에 망조가 든다. 북한 ‘극초음속 미사일 성공’ 주장에 대응해 국민의 안보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또는 북한의 대남 선전전에 맞대응하기 위해 발표했으리라 여긴다.

그럼에도 발표 의도가 무엇이었건 군은 북한의 미사일 실력을 무시했다가 이를 번복한 꼴이 됐다. 그러는 사이 북한은 마치 남한의 헛발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사일을 쏘아대고 있다.

채병건 국제외교안보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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