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독립50대] 나이 오십에야 알았다, '개근상'보다 중요한 것
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 <편집자말>
[전윤정 기자]
얼마 전 물건 정리를 하다가 작은 상자 하나가 나왔다. 옷감과 실, 재봉 부자재 등이 들어 있었다. 십여 년 전 나는 동네 공방에서 재봉틀을 배운 적이 있다. 주위 엄마들이 재봉틀로 뚝딱 만든 아이들 소품이나 옷을 보면 부러웠다. 바짓단이라도 내가 줄여보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재봉틀에 실을 꿰는 것부터 도대체 손에 익질 않았다. 밑실을 감아 북집에 넣어 실을 빼놓고, 윗실을 실채기에 끼워 감아 내리고, 실 끼우기 장치를 내려 다시 실을 숫자 4모양을 만들어…… 아, 매번 헷갈렸다. 그럴 때마다 강사에게 묻기도 민망했다. '나는 재봉에 재능이 없구나' 싶어 기초 과정만 겨우 마치고 그만두었다.
▲ 취미일지라도 꾸준히 해내지 못한 것에 늘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
ⓒ envato elements |
마흔이 되기 전에 수영법을 마스터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일도 생각난다. 유연성이 떨어져 접영에서 진전이 없던 나는 '감전된 갈치 같다'는 수영코치의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
지인을 따라 데생도 배웠다. 중학교 때 화실을 다녔던 자신감으로 신나게 시작했지만 영 재미가 없었다. 사과만 3개월간 그리다 그만두며 '40년 동안 사과를 그렸다는 세잔(Paul Cézanne)은 정말 대단한 화가로구나' 싶었다.
프로 주부가 되고 싶어 다닌 요리 교실이나 꽃꽂이 교실, 아이들과 함께 다시 시작한 피아노, 운동 삼아 시작한 한국 무용, 발레…… 그동안 배우다 그만둔 것을 하나하나 손에 꼽다보니, 나의 인내심 부족과 끈기없음을 자책하게 된다. '좀 더 해볼 걸 그랬나?'
우리 사회에서 '끈기'는 중요한 덕목이다. '쉽게 단념하지 아니하고 끈질기게 견디어 나가는 기운'은 급격한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동력이기도 했으리라.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나이 오십이 넘은 우리 세대의 '개근상'이 아닐까.
학생의 미덕인 성실과 끈기를 출석으로 증명한 개근상은 우등상보다 값진 상이라고 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죽을 만큼 아프지 않으면 학교 가야지', '아파도 학교에서 아파라' 하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나는 개근상을 타본 적이 없다. 감기만 들면 편도선이 심하게 부어 열이 올라 자주 결석을 했다. 결국, 고등학교 때 편도선 수술을 했다. 나는 건강상 이유로 개근상을 받지 못했는데, 마치 '너는 끈기가 부족하고 불성실하다'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듯했다.
"뭔가를 시작했다 금세 그만둬도 괜찮다. 그 일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중략)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면 옳은 길을 되찾아 나오면 된다. 가야 할 길이 아니라면 아무리 멀리, 아무리 많이 걸어갔다 해도 미련 두지 말고 냅다 돌아 나오는 게 좋다. (34쪽)"
태극권, 클래식 기타, 바이올린, 옷 만들기, 뜨개질, 수채화, 데생, 펜화, 목공, 영화학교 등등 '프로 배움러'인 그는 꾸준히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하지 말라고 한다.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치기 때문이라며 눙친다. 하지만 '마무리 짓는 기술'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뭐라도 건진 것이 있는지 확인하고 야무지게 마무리해야 회의감이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 그만둔 배움의 경험이 오늘의 나에게 새로운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
ⓒ envato elements |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수영 수업에서 처음 잠수법을 배웠는데, 의외로 잠수에 재능이 있었다. 태아가 되어 엄마 양수 속으로 다시 들어간 듯 편안했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요리 교실에서 배운 감자탕 하나는 끝내주게 맛있게 끓인다. 가끔 꽃 선물을 받으면 꽃꽂이 교실에서 쓰던 화기와 침봉을 꺼내 멋스럽게 꽂아보기도 한다. 배움에서 하나라도 얻는다면, 새로 시도한 용기와 시간은 충분히 의미가 있구나 싶다.
모든 배움을 '공부'라고 할 때,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 찾아가는 노력이 진정한 공부가 아닐까. 나 역시 이런저런 길을 돌아 '글쓰기 공부'만은 스스로 하게 되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더 나은 글을 쓰는 내가 되기 위해' 책을 찾아 읽고, 강의를 듣고, 꾸준히 무언가를 쓴다.
게다가 중도 하차한 많은 배움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글을 쓸 때도 도움이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그만둔 발레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에, 나이 칠순에 평생 꿈이었던 발레를 시작하는 드라마 <나빌레라>에 관한 글을 쓸 수 있었다. 발레를 배우는 과정이 고되고 힘들어도, '죽기 전에 한 번쯤은 날아오르고 싶은' 주인공 덕출(박인환 역)의 진심과 열정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무언가 배우면서 즐겁고 행복했던 추억도, 힘겹고 괴로웠던 기억도 나에게 귀한 자산이다. 그만둔 배움의 경험이 오늘의 나에게 새로운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앞으로도 새로운 배움에 계속 도전해야겠다. 아니다 싶으면 얼른 발길을 돌리면 된다. 인생의 길은 생각보다 길고, 수많은 오솔길이 넓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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