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결정적 장면⑰] 사라지지 않아야 할 곳, 잊히지 말아야 할 가치(그해 우리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어디에 사는가는 알게 모르게, 장단기적으로 대중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저런 곳에 살고 싶은’ 마음은 ‘저곳이 어디인지’로 이어지고, 나의 거주 현실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로망이 생기고 나의 사회적 계층이 어디쯤인지 자연스레 인식된다. 그래서 신축 아파트나 타운하우스들이 드라마에 장소 협찬을 하고, 드물게는 주인공 집 정도가 아니라 아예 드라마 전체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특히나 집안 곳곳을 비추며 가구나 장식품, 전자제품들까지 눈에 들어오면 때로는 우리의 예술 의식을 높이지만 대게가 자본주의적 소유 욕망을 부추긴다. 각종 제조업체, 더러 갤러리들이 앞다투어 거금을 내면서라도 드라마에 협찬하려 경쟁하는 이유다. 유명 제작사가 만들고 스타 배우들이 출연해 인기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드라마에는 협찬이 줄을 서고, 먼저 줄 서지 않았어도 섭외 연락이 오면 주저하기 힘들다.
과거에는 몇몇 인기 작가가 자신의 수익을 높이기 위해 생뚱맞은 협찬을 대본에 욱여넣더니 최근에는 연출자마저 앞장서 시청자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작가가 협조했다면 좀 더 자연스레 녹여내겠지만, 작가는 동의하지 않는 협찬을 들이니 드라마에서 동동 떴다. 한 드라마에서 배우 오정세가, 협찬임이 분명해 계속 등장해 온 제품을 거부하며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장면이 시청자에게 시원한 공감을 준 이유를 곱씹을 일이다. 딱 시청자 마음이었다. “이제 제발 그만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얘기가 샜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주인공이 어디 사는지, 배경이 어디인가는 중요하다.
요즘 드라마 ‘그 해 우리는’(연출 김윤진 이단, 극본 이나은, 제작 스튜디오N·슈퍼문픽쳐스)을 즐겨 보는데, 처음에는 배우들이 먼저 들어왔다. 영화 ‘마녀’ 때의 풋풋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되찾은 듯 물오른 김다미, 섬세한 감성을 표나지 않게 표현해서 더 울컥하게 하는 최우식, ‘역시, 이 배우들이 있으니 작품이 안정되네’ 엄지를 세우게 하는 박진주 차미경 박원상 서정연, 작품 이력이 짧아도 준비된 배우들은 제 역을 찰떡같이 붙여내는구나 싶은 노정의 김성철 안동구 전혜원, ‘이 좋은 배우들이 조연해 주니 행복하네’ 기분 좋은 만족을 주는 조복래 허준석!
그 외의 배우들까지 연기에 물 샐 틈 없어 몰입을 쉽게 하니 감탄하며 보다 ‘문득’ 깨달았다. 홍보사 팀장 국연수(김다미 분)가 할머니(강자경, 차미경 분)와 사는 집이 1970~80년대 흔히 보던 골목 길모퉁이 집이다. 스타 일러스트레이터 최웅(최우식 분)의 집도 멋들어진 실내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다. 드라마 작가 출신 술집 사장으로 연수의 친구인 이솔이(박진주 분)까지 한 동네 사는데 집들에 온기가 흐른다. 웅이의 부모(박원상, 서정연 분)가 운영하는 음식점도 대로변에 출입구부터 있지 않고 마당이 있는 한옥인데 오가는 이의 추위는 녹여주고 더위는 가셔줄 것 같은 훈훈함이 느껴진다.
반면 다큐멘터리 감독 김지웅(김성철 분)이 사는 집은 아파트인데 냉기가 흐른다. 아이돌 가수 엔제이(노정의 분)의 거처는 가능한 배제되고 주로 이동하는 차 안, 고된 노동의 연장선을 보여주니 인기 스타의 화려한 면모와 금전적 성공이 강조되지 않는다.
연수에겐 부모의 그늘이 없고, 웅에겐 친부모가 없고, 웅의 양부모는 자식을 잃었고, 이솔이는 혼자 살지만 추워 보이지 않는다. 내 마음을 살뜰히 보듬어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 지웅에게는 엄마가 있지만 언제 왔다 언제 갈지 모르고 혼자였던 습관에 사람에게 다가서지를 못하고, 엔제이는 사람에게 잘 다가서는 씩씩한 성격이나 주변엔 온통 일정과 인기 관리 인력만 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인다. 그러한 모습들이 사는 곳의 모습과 온도로 표현돼 있다.
판에 박은 듯 자본주의적 성공이 표나게 강조된 부잣집과 표나게 초라한 가난한 집이 등장하는 일일드라마나 미니시리즈를 보다 ‘그 해 우리는’의 차별화된 시선과 깊이가 담긴 배경을 보니 기쁘다. 추억 속 공간으로 돌아간 듯해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하고, 아파트 단지로의 편입은 자의가 아니라 해도 생활의 편리에 동의해 죄다 부셔서 다가구 빌라를 지을 수도 있었을 텐데… 소중한 공간을 지키고 계신 분들 덕분이라는 생각에 고마움도 인다.
어디엔가 여행을 가면 랜드마크가 되는 건물을 찾아가거나 대형 폭포라든가 대표적 관광지를 찾던 추세에서 최근엔 무슨 무슨 마을처럼 옛집의 형태가 남아 있고 담벼락의 소박한 벽화들을 볼 수 있는 골목골목을 찾는 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곳을 선호하는 이유와 배경이 각기 다르다고 해도 반갑기 그지없다. 사라지지 않아야 할 곳이 남아 있어서 가능한 일이고, 그런 발길들이 그곳을 지키고 우리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가치를 지켜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가치, ‘그 해 우리는’이 전하는 잊히지 말아야 할 가치는 사람은 함께할 때 따뜻하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따뜻하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왓챠에서 볼 수 있는 ‘커피 한잔 할까요’의 공간 배경과 등장인물의 집들도 아늑함이 깃든 동네, 혼자 살든 같이 살든 일상이 깃든 ‘홈(home)’이다. 그해 우리가 어떻게 살았고, 오늘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해 주는 ‘그 해 우리는’은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SBS에서 볼 수 있다. 12회까지 방영이 됐고 이제 4회가 남았는데, 1회부터 정주행하고 싶다면 웨이브와 넷플릭스에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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