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에 식민 통치 핵심기구가 눌러 앉은 사연 [서울 근대건축 톺아보기]
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 옛 중앙청과 경기도청(1980) 조선 총독부가 중앙청으로 사용될 당시 모습.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성을 경기도에 예속시키면서, 옛 의정부 터 자리에 지은 경기도청사(사진 좌측 하단)가 남아 있음. 이 두 건물은 1990년대 순차적으로 해체됨. |
ⓒ 서울역사박물관 |
광복 50주년(1995)에 철거된 옛 중앙청을 두고 벌인 해묵은 논쟁이 떠오른다. 철거와 보존으로 나뉘어 오랜 시간 입씨름했다. 이 논쟁으로 우리 안에 뿌리내린 식민사관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새삼 실감했다.
2022년 이 사안으로 다시 논쟁을 벌인다면, 상반된 한두 가지 의견이 부딪힐 듯하다. 일제가 뿌리 깊게 심어놓은 식민성이 여전히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이를 청산하지 못했고, 그 수렁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했다.
답은 간단명료하다. 건물은 깨끗이 철거해야 할 현시(顯示)고, 치욕스러운 역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할 아픔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치욕마저 망각해 버린다면, 민족의 미래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조선 창업 이래, 경복궁과 남산은 도시 조영과 통치 공간을 상징하는 핵심적 장소성(場所性)을 가진 곳이었다. 일제가 이 두 공간을 훼철하는 과정이, 흡사 우리 혼과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 같아 소름 돋는다.
남산 통치공간
일제 침략이 가능했던 배경에 '군사력 우위'가 있었다는 건 불문가지다. 남산자락을 깔고 앉은 서양식 공사관이 완공(1893)되고, 일제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다. 그러나 새로운 경쟁자 러시아를 맞이해야 했다. 일제는 한반도에서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려 늘 노심초사다.
아관파천 후 '고무라-베베르 협정(1896.05)'으로 군대 상시 주둔이 가능하게 조치한다. 한국주차대 편성이다. 이때 필동에 군사기지가 터를 잡는다. 이를 러일전쟁에 임박해 한국주차대사령부(1903.12)로, 전쟁 중엔 한국주차군사령부(1904.04)로 확대 개편한다.
▲ 남산 총독부(통감부) 1907년 조선통감부 청사로 지어져, 강제 병합 후부터 1925년 까지 총독부 청사로 사용된 건물. 2022년 현재 공터로 남아 있으며, 리라 초등학교 바로 아래 위치. 직전까지 서울애니메이션센터로 사용되었음. |
ⓒ 서울역사박물관 |
남산에 통감부 청사(1907.01)를 새로 짓는다. 1925년까지 총독부로 사용된다. 남산이 정치·경제·군사에서 조선 강탈 핵심 지휘 공간으로 변모한다.
▲ 구 경성부청 일본 영사관으로 지어져 을사늑약 후엔 경성 이사청으로, 강제 병합 후엔 경성부청으로 사용된 건물.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있었음. |
ⓒ 서울역사박물관 |
르네상스식 2층 벽돌집 일본 영사관(1886.12)이 충무로 1가에 있었다. 신세계백화점 자리다. 이 건물이 을사늑약 후 경성 이사청으로 전용되고, 강제 병합 후엔 경성부청으로 사용된다.
도시구조 개편
강제 병합 직후 일제는 경성 통치공간 재구성에 착수한다. 경복궁-덕수궁-남산-용산기지를 이어 하나의 통치 축으로 재구성하는 프로젝트다. 문명화나 근대화가 아닌, 오로지 차별화된 식민 지배와 수탈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써다.
▲ 경성시구개정예정계획노선도(1912) 총독부 시구개수계획을 구체적인 도면으로 그린 자료. 4대문 안 도로계획(붉은 선)과 더불어, 용산 일대를 묵시적으로 중요시한 흔적이 엿보임. |
ⓒ 국토지리정보원 |
계획이 다시 수정(1919)된다. 이때의 목표는 단순하다. 조선과 대한제국 통치 공간의 소멸적 지배 위에 태평로 중심 새 식민 지배 공간 창출이다. 일본인 거류지를 경성 중심 상업 지역으로 위치시켜,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동화정책을 구현하는 건 부수적 목표다. 태평로를 연장하여 노량진과 영등포를 공업화 예비부지로 활용할 의도를 드러낸다. 한강 인도교(1917) 개통이 그 시작이다.
조선총독부
흥선대원군이 중건(1868)한 경복궁을 일제가 순차적으로 망가뜨린다. 강제 병합 서너 달 전, 전각 4000여 칸을 헐어 민간에 팔아먹는다.
▲ 조선총독부 스케치(1914) 강제 병합 직후부터 경복궁에 총독부를 두어 조선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실증하는 자료. 중앙 돔 형태가 나중 지어진 모습과 다름. 지어진 중앙 돔은 일본 왕이 머리에 쓰던 관을 형상화 한 것으로 알려짐. |
ⓒ 서울역사박물관 |
지하 1층 지상 5층, 건축면적 9020㎡, 높이 22.7m 규모로 신청사 기본설계가 마무리(1914)된다. 54.54m 높이 중앙 돔은 경성 시가지를 압도한다. 관악산을 향한 경복궁 축선에서 동으로 어긋나게 틀어 남산 조선신궁과 일치시킨다. 경복궁 상징성을 철저히 짓밟는 설계다. 조선이 일제로 대체되었다 선언하는 모양새다. 조선물산공진회가 끝난 빈터에서, 일본식 지진제(1916.06.25)가 열린다.
▲ 조선총독부 '전조선 최고 관청'이란 문구가 선명. 엽서 곳곳에 지은 시기, 소요 금액, 동양제일의 건물이라는 선전 등등이 간략히 기록되어 있음. |
ⓒ 서울역사박물관 |
철근콘크리트 구조 외부를 12.12cm 두께 화강석을 붙여 치장한다. 모든 재료는 조선 땅에서 해결한다는 원칙이다. 약 675만 원을 들여 10년 후 입주(1926.01.04)한다. 칼 맞은 이완용이 입주식에 참석하고 얼마 후 죽는다. 일제 시정기념일(1926.10.01)에 맞춰 낙성식을 치른다.
▲ 육조거리 조감(1930) 조선 총독부가 경복궁에 들어 선 후의 모습. 황폐해진 경복궁과 달리 너른 육조거리 좌우로 옛 관청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음. 사진만으로도 일제 의도가 확연히 엿보임. |
ⓒ 서울역사박물관 |
이때 광화문이 겨우 살아남는다. 일본 문예 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덕분이다. 그는 <개조 1922년 9월호>에 '없애버리려고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로 총독부 처사를 비난한다. 이 글로 사라질 뻔한 광화문이 건춘문 왼편으로 옮겨지는 계기가 된다.
경성부청
경성부청 행정업무가 급증하여 신청사 건립 문제가 대두하나, 재원이 충분치 못하다. 친일파 조선인과 거류민 위주로 구성된 '경성도시계획연구회'가 전면에 나서 총독부와 협의, 신청사 건립에 대한 원칙을 세워 놓는다.
▲ 옛 경성부청 1926년 경성부청으로 지어져, 서울시청으로 오랜 기간 사용된 건물. 왼편 뒤로 옛 경성일보(서울신문) 자리가 보임. 태평로에 면한 일부는 후에 증축한 부분임. |
ⓒ 이영천 |
총독부는 경성일보 터에 설계를 마련(1922)해 놓고, 제반 조건이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가 터를 양보(1923)하고, 그 옆자리에 사옥을 신축(1924)하여 옮긴다.
경성일보 건물을 철거하고 총예산 50만 원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착공(1924.08)한다. 총독부 건립과 연동된 공사는 자재 수급이나 노동자 동원이 수월하다. 건물도 수수한 사무용 공간을 건립하는 것이어서, 난공사도 없다.
경성부청은 모든 격이 총독부 건물 대비 한참 뒤처진다. 연 면적 8215㎡, 지상 4층 건물로 준공(1926.10.30.)한다. 일본인 설계자는 부지 모양을 따른 '弓' 자 형상화라 설명한다. 지금의 서울도서관이다.
조선 총독관저
남산 일본 공사관이 통감관저였다가 총독관저로 쓰인다. 용산기지에도 휘황찬란한 총독관저(1908)가 있었다. 경복궁 북쪽에 경무대(景武臺)라 부르던 총독관저가 들어선다.
▲ 경무대 총독관저(1939)-미군청정장 관사-경무대(대통령 집무실)-청와대(1960)였던 건물. 1993년 김영삼 정부 때 철거하고, 그 자리에 '수궁 터' 표석을 세워둠. |
ⓒ 서울역사박물관 |
해방 때까지 총독관저로 사용되었고, 해방 후 미군정청 최고 책임관 하지 중장이 관저로 사용한다. 정부 수립 후에도 이름을 바꾸지 않고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다 윤보선이 청와대(靑瓦臺)로 개명(1960.12)한다. 현 청와대 본관을 신축(1990)하여 이전한 후 철거(1993.10.15)하고, 일제가 파헤친 백악산 능선을 보강한 후 '수궁 터' 표석을 세웠다.
일제가 세운 경복궁-덕수궁-남산-용산을 잇는 식민 도시 경성의 통치·지배 공간을 보며, 우리 정신과 의지는 정녕 얼마나 자유로운지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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