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스스로 개척한 '식스맨'의 전설, 영원한 하늘의 별로

이준목 2022. 1. 14.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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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명일 코치, 간암 투병 중 별세.. 코트 안에서는 파이터, 밖에서는 모범생

[이준목 기자]

 현역 시절 돌파를 시도하는 고 표명일 코치(왼쪽)
ⓒ 연합뉴스
 
새해 초부터 농구팬들에게 안타까운 비보가 전해졌다. KBL 남자프로농구 식스맨상 출신인 표명일 양정고 농구부 코치가 지난 12일 밤 지병으로 별세한 사실이 알려졌다. 향년 47세. 고인은 최근까지 간암으로 투병 해왔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5일 오전 6시다.

그동안 고인의 투병 사실이 일반 대중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에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많은 농구팬들이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했다. 농구 관련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고인을 향한 추모의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다. KBL도 공식 SNS에 표명일의 현역 시절 사진을 띄우며 "표명일 양정고 코치의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져왔습니다. 고인의 농구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을 게재했다.

양정고, 명지대를 졸업한 표명일은 1998년 신인 드래프트 전체 9순위로 부산 기아(현 울산 현대모비스)에 입단해 프로에 데뷔했다. 이후 전주 KCC-원주 동부를 거쳐 부산 KT(현 수원 KT)까지 총 13시즌이나 활약을 이어가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표명일은 이른바 '대기만성' 혹은 '와신상담'이라는 고사의 산 증인이다. 1975년생으로 현주엽-신기성-김택훈 등과는 동갑이고, 이상민-강동희-김승현-서장훈 등 전설적인 선수들과도 모두 동시대에 활약했던 표명일은, 이른바 '농구대잔치 세대'라고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대학농구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농구대잔치 시절만 해도 표명일에 대한 인지도는 거의 없었다.

표명일은 명지대학교의 주전 포인트 가드였지만 모교의 전력이 연세-고려-중앙대 등 다른 대학 강호들에게 크게 밀렸고 본인의 가드로서의 기량도 동갑내기 신기성의 그늘에 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인드래프트에서 당당히 1라운드에 지명되었고 가드 포지션으로서는 신기성에 이어 두 번째였을만큼 잠재력은 어느 정도 인정받은 선수였다.

프로에서의 행보도 처음부터 순탄하지는 않았다. 당시 프로농구는 지금과 달리 '포인트가드 왕국'이었다. 강동희(승부조작 논란으로 제명)-이상민-주희정-김승현-신기성-양동근 등 표명일의 프로선수 커리어 내내 리그의 역사에 손꼽힐만한 엘리트 가드들이 숱하게 쏟아져나오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역대 원탑을 다투던 강동희와 이상민이, 그것도 하필 두 선수의 최전성기 시절에 표명일의 팀메이트로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있었다. 당연히 주전 자리는 꿈도 못 꿀 상황이었고 짧은 출전시간만 얻을 수 있어도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였다. 신기성이나 김승현이 신인 시절부터 동시에 포인트가드 자리가 약한 팀에 지명되어 주전 자리를 꿰찼던 것과 비교하면 억세게 운이 없었다고 할만하다.

당시 표명일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1999년 대학 동기였던 아내와 일찍 결혼했던 표명일은 데뷔 시즌 연봉이 약 5천만 원에 불과했다. 여기에 1년 만에 상무에 입대까지 하게 되면서 당시 생긴 첫째 아이를 아내 혼자 키워야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하지만 표명일은 운명에 굴하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부산 기아 시절에는 강동희의 백업으로, KCC에서는 이상민의 백업가드로 짧은 시간이나마 기대 이상의 준수한 활약을 펼치져 조금씩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나갔다.

오히려 프로에서의 주전 경쟁 때보다 더 힘들었다는 대학 시절의 혹독한 훈련을 이겨내며 키운 '독기'는 그의 농구 인생에 큰 자양분이 됐다. 포인트가드로서는 평균적인 피지컬-운동능력을 지녔음에도 특유의 성실한 플레이에 악착같은 수비력을 갖춘 표명일은 백업으로는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선수로 팀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됐다.

표명일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빛을 발한 것은 2003-2004 시즌부터였다. 당당히 팀의 주역으로서 KCC 우승의 한 축을 담당하며 기량발전상과 식스맨상을 동시에 휩쓰는 영광을 누렸다. FA자격을 얻은 뒤에는 다른 팀의 주전급 제안도 뿌리치고 KCC에 잔류하며 남다른 충성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주전이었던 이상민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잔부상으로 종종 경기에 결장했을 때는 주전으로 출장하여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여줬고, 약점으로 지적되었던 득점력도 차츰 향상되며 명실상부한 리그 최고의 백업 가드로 인정받았다.

2006-2007 시즌 초반인 2006년 11월 12일, 창원 LG와의 홈경기는 이른바 표명일의 인생 경기로 꼽힌다. 당시 이상민이 햄스트링부상으로 결장한 상황에서 팀이 극도의 부진에 빠진 위기 상황에서 선발로 나선 표명일은 '외곽슛이 약한 선수'라는 선입견이 무색하게 3점슛 10개 포함 40점을 퍼붓는 신들린 활약으로 팀을 연패 수렁에서 구해냈다.

공교롭게도 이때 당시 LG의 사령탑은 옛 은사인 신선우 감독이었다. 신 감독은 2002년 표명일을 직접 트레이드로 KCC에 데려오며 우승까지 합작하고 최고의 식스맨으로 키워준 인연이었다. 그만큼 표명일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신 감독은 그의 슛이 약하다는 것을 노려서 극단적인 새깅 디펜스를 시도했는데, 표명일이 보란 듯이 3점슛을 폭발시키며 옛 은사에게 한방을 먹인 셈이 됐다.

이때의 활약이 너무도 강렬했던 탓에 이후 표명일에게는 '표코비'(표명일+코비 브라이언트)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사실 포지션도 다르고 수비 전문 선수였던 표명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었지만, 잠잠하다가도 종종 승부처에서 등장하여 뜻밖의 한 방을 터뜨려주는 클러치능력은 농구 팬들에게 얼마나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표명일의 반전 드라마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6-2007 시즌 중반 다시 한번 트레이드되며 원주 동부(현 DB)의 유니폼을 입게된 표명일은 프로 데뷔 이후 마침내 처음으로 주전 포인트가드의 자리를 꿰차게 됐다. 당시 동부는 김주성을 중심으로 '동부산성'이라고 불릴 정도의 고공농구가 강점이었지만 신기성의 이적 이후 포인트 가드 자리가 고질적인 약점으로 꼽혔다. 개인 기량이 특출하지는 않지만 투지와 활동량, 안정딘 전술수행능력을 갖춘 표명일은 전창진 감독이 선호하는 타입에 잘 맞는 포인트가드였다.

표명일은 2007-2008 시즌에는 데뷔 후 가장 많은 평균 30분 56초를 소화하며 11월에는 생애 첫 '이달의 선수'에 선정되기도 했고, 해당 시즌 동부의 통합 우승까지 기여했다. 그리고 이는 현 DB 시절까지 포함해도 원주가 마지막으로 따낸 챔피언결정전 우승 기록으로 남아있다. 표명일로서는 무명의 백업가드로 시작하여 험난한 프로무대에서 10년을 끈질기게 버텨내며 마침내 우승팀의 주전 포인트가드로까지 성장하는 인생역전을 현실로 이뤄낸 순간이었다.

또한 그해 표명일은 우승 외에도 농구팬들 사이에서 어쩌면 그의 농구인생 전체보다 더 유명하게 회자될 불멸의 명장면을 남겼다. 바로 '모래반지 빵야빵야' 사건이다. 2007년 12월 2일 친정팀 KCC전에서. 표명일이 경기 중 상대 선수(외국인 선수 칼 미첼)와 신경전을 펼치다가 거친 말을 내뱉는 장면에, 의아해하는 유재학 현대모비스 감독의 표정을 절묘하게 합성시킨 이미지를 의미한다.

당시 욕설을 하는 표명일의 입 모양이 소리를 빼고 들으면 마치 '모래반지 빵야빵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유래했다. 이는 누리꾼들을 통하여 다양한 패러디를 자아내며 인터넷 밈으로까지 유행했다. 심지어 표명일이 은퇴한 이후까지도 연관검색어로 종종 화제가 되기도 했다. 표명일이 농구선수인지는 모르는 사람들도 모래반지 빵야빵야는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정도다.

표명일은 훗날 인터뷰에서 "당시 경기 분위기가 격해져 상대 선수에게 욕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오해로 비롯된 상황이었고 나중에 상대 선수에게도 사과를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연히 유재학 감독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는 코트 위에서는 거칠 정도로 저돌적이고 승부욕이 강한 면과 맞물려 더 화제가 된 측면이 있다.

당시 표명일은 "상대팀에서 뛸 때 거친 플레이와 이미지 때문에 저를 싫어했다고 고백한 선수들도 있다. 막상 운동할 때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고 놀라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코트 밖에서의 '사람 표명일'은 코트 밖에서는 팬들은 물론 후배들이나 제자들에게도 항상 친절하고 격의없이 소통하는 등 부드러운 모습이 더 돋보였던 인물로 기억된다. 실제로 표명일은 코트 안에서는 파이터였어도 팀의 구성원으로서나 경기 외적인 사생활 면에서는 어떤 구설수 없이 항상 모범적이었던 인물로 회자된다.

표명일은 2009-2010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취득, 부산 KT(현 수원 KT)와 계약하며 전창진 감독과 재회하며 팀의 정규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하지만 표명일은 KT에서는 나이 때문인지 부진한 모습으로 연봉에 비하여 KCC-동부에서만큼의 활약을 재현하지는 못하여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표명일은 결국 2011-2012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후로 미국 샌디에이고대학 객원코치-프로농구 DB 코치 등을 역임했으며 2018년 3월부터는 모교 양정고 코치로 부임하며 후배 양성에 전념해왔다. 하지만 40대 후반이라는 아직 젊은 나이에 불의의 병마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지며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돌이켜보면 표명일은 농구선수로 남들보다 그리 특출한 신체조건도 재능도 지니지 못했지만, 특유의 성실함과 노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바꾸어놓았다. 선천적인 조건이 많은 영향을 좌우하는 농구의 세계이기에 표명일의 성공신화는 더욱 이례적이다. 표명일은 1990년대-2000년대-2010년대까지 무려 3번의 시대를 경험했고, 그와 함께 프로에 입단했던 1998년 신인드래프트 동기들을 모두 코트를 떠날 때까지도 가장 늦게까지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이어가며 장수한 것이 바로 표명일이었다.

'인생은 강한자가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 가는자가 강한 것'이라는 교훈을 표명일은 자신의 농구인생을 통해 증명했다. 그리고 식스맨의 전설이 되었던 남자는, 조금 일찍 우리 곁을 떠나 이제 영원히 하늘의 별로 남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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