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거세질 단일화 압박, 안철수의 선택은
이번 대선은 보통의 선거 상식과 다르게 전개되나 했다. 총선은 회고적 투표지만 대선은 전망적 투표가 대세를 이룬다는 정치 분석이 무색하게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 정권심판론이 다른 이슈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당내 경선부터 야당 후보들은 정권교체 여론에 편승해 특검과 네거티브 공세에만 목을 맸다. 초기 대선 국면은 분노와 응징, 듣지도 따지지도 않는 맹목적 진영 대결에 빠져들며 최악의 비호감 선거로 가는 듯했다. 분위기를 단번에 바꾼 계기는 지루하기 짝이 없을 법한 삼프로TV의 90분짜리 경제대담 프로그램이었다.
대담 내용이라야 투자 경험이나 실물경제 이해도, 부동산이나 자산시장 정책을 알아보는 정도라서 정책의 디테일이나 토론의 기술보다는 후보의 태도나 진솔한 신념 토로가 더 빛을 발했다. 지지자를 열광시킬 극적 장면 하나 없었지만 두 후보 것만 해도 누적 조회수가 1000만을 넘겼다는 사실은 유권자들이 무엇에 목말라 했나를 잘 보여준다. 이를 계기로 진영 대결로만 치닫던 선거 양상이 인물과 정책 평가 국면으로 전환됐고 정권교체론에만 의존하던 국민의힘은 큰 혼돈에 빠져들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팬데믹 공포와 불안한 미래에 맞서 치유와 회복, 통합과 전환의 청사진을 내놓지 못하는 후보는 아무리 유리한 선거 구도에서도 쉽게 이길 수 없다는 경고를 먹은 셈이다.
이제 겨우 정책의 시간으로 진입하던 대선 레이스가 또다시 정권교체를 위한 후보 단일화 논의에 빠져드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정권을 일단 바꿔놓고 보자는 단일화 정치 공학에 무슨 감동이 있을까 의문이지만 대선을 문재인 정권 심판의 카니발로 만들려는 강성 야당 지지자들의 압박은 갈수록 기승을 부릴 것이다. 선거마다 확인한 사실이지만 단일화는 결국 소수당 후보를 무너뜨려 전선을 단순화하고 양자택일의 선택지만 강요한다. 그 결과가 어떻든 대선 이후 과정은 불 보듯 뻔하다. 지난 20년간 정치가 갈등을 수렴하기보다 증폭하고 통합보다 분열을 조장해왔듯이 5년 주기로 반복되는 ‘실패한 정권 만들기’ 악순환이 예정돼 있을 뿐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작년 10월 ‘한국 정치의 전환과 한반도 평화’란 발표문을 통해 한국 갈등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압도적으로 높고 각종 사회지표나 삶의 만족도가 낮은 근본 이유로 정치의 실패를 지목했다. 유권자 표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승자독식 선거제도 탓에 대화와 타협이 어렵게 되고 국가적 개혁 과제들은 미뤄진다고 분석한다. 젠더 갈등부터 외교·안보까지 갈등을 키워 열혈 지지층을 확보하려는 분열의 정치가 계속되는 한 어떤 정부도 실패를 피할 수 없다. 꼭 개헌으로 권력구조를 개편하지 않더라도 노태우정부가 여소야대의 어려운 조건을 뚫고 남북 기본합의와 북방외교에 초당적 협력을 끌어냈던 사례나 김대중정부의 좌우합작에서 보듯이 연합의 정치는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다.
문재인정부가 실패했고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그 원인은 잘못된 정책 자체가 아니라 정치의 실패에서 찾아야 한다. 정책은 이해관계에 따라 찬반이 갈릴 수밖에 없다. 경제정책도 과학이 아닌 이상 선택이고 정치적 결정에 좌우된다. 문 정부를 실패한 정권으로 만들기로 결심한 세력에게 어떤 정책인들 마음에 들겠는가. 문 정부의 적폐청산은 진영 대결과 정치적 양극화를 격화시켜 야당을 사생결단에 나서게 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실패다. 미래로 나아가야 진정으로 과거를 용서하고 청산할 수 있다는 자세가 필요했다. 문 정부를 심판하겠다며 양자 대결의 진검승부로 몰아가는 후보 단일화 전략은 이 악순환의 함정으로 다시 빠져드는 꼴이다.
대선 마지막 국면에서 단일화 압박에 몰린 안철수 후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분열로 치달아왔던 한국 정치의 관행도 달라질 수 있다. 진영 대결의 양당 정치로 회귀할지, 타협과 연합의 새 정치로 나아갈지는 단일화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렸다. 단일화에 나서더라도 그것이 꼭 승리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금개혁이나 다당제로 가는 선거법 개정, 과학기술중심국가 비전과 같은 자신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기를 바란다. 최근 칠레 대통령 선거나 올 4월 프랑스 대선은 결선투표제를 통해 최종 승자를 가릴지언정 유권자의 심판을 받아보지도 않고 공동의 정책 플랫폼도 없이 여론조사를 통해 후보를 사퇴시키는 만행은 없었다.
최영기(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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