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일자리', 나는 편의점에서 찾았다 [나는 ADHD 노동자입니다]

천승원 2022. 1. 12.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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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ADHD 노동자입니다 ⑨] 노력과 의지, 가능성을 인정받는 환경

늘 어딘가 남과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서른에야 ADHD라는 병을 처음 알았고, 서른여덟에 성인 ADHD 확진을 받았습니다. 실체를 모르는 병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사람들 각자가 품고 사는 보이지 않는 아픔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많은 아르바이트와 직장을 거친 후 자신에게 맞는 생활을 찾은 지금, 저의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보이지 않는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분들의 삶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손을 흔들어 봅니다. <기자말>

[천승원 기자]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뭐 어쩌라고?'

그땐 분명 내 인생의 '쭈구리 시절'이었다. 사회공포증이 심해져 알바 두 곳, 전업 직장 두 곳을 차례로 그만두고, 타악으로 밥값을 벌어보겠다고 활동하던 동호회도 같은 이유로 빠져나왔다. 몇 달 쉬니 당장 마음은 편했는데 계속 그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뭐 해 먹고 살지? 어떤 일을 떠올려 봐도 '땡'이었다. 한심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로선 무작정 긍정적이 되긴 어려웠다. 주의력 결핍 증상 때문에 무리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제는 작은 스트레스에도 두통과 현기증이 일어 쉬어야 했고, 체형이 전체적으로 틀어져 30분 이상 앉고 서고 걷는 게 힘들었다.

동호회 활동을 같이 하던 지인이 아는 편의점을 소개해준 게 그런 때였다. 편의점이라... 그 특유의 산만한 일처리 방식이 나랑 잘 맞았던 알바지만, 다시 하자니 자신이 없기도 했다. 툭하면 틀린 시재를 맞추느라 일당의 반을 쓰고 괴로워하던 일이 떠오르고, 준비된 걱정들이 따라왔다.

사장님이랑 손님들이 내 실수를 이해해줄까? 매일 사람을 대하면 다시 패닉을 겪지 않을까? 교대하는 알바한테 계속 피해 주면 어떡하지? 내 몸이 버텨내려나?

사실 주된 ADHD 증상과 신체적 지병의 한계를 모두 피해가자면 이런 일자리가 필요했다. '오래 앉지도 서지도 걷지도 무거운 짐을 나르지도 않으면서, 혼자서만 일하고, 적응하기 쉬운 업무이면서도 너무 지루해서 도망갈 정도는 아니고, 말을 많이 안 해도 되고, 어울려야 되는 사람들이 없으며, 주변에서 내 실수에 너그럽고, 그럼에도 돈을 주는 곳.' 먹고 살겠다는 말인가, 말겠다는 말인가?
 
▲ 편의점 알바 여기서도 하다 못 버티면 마지막 용기마저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어쩌면 이게 사회와 나의 합의점일지도 몰랐다.
ⓒ 한경
 
하지만 아무리 쓸모없어 보이는 나라도 길바닥에 던져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일 년을 지속했던 알바가 이런 시기에 다시 찾아왔으니, 이건 나와 사회의 최종 타협점이 아닐까? 기회가 온다는 게 감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17년 만에 편의점 계산대에 섰다.

궁극의 일자리

출근 첫날, 불안했다. 초면의 사장님이 보시기에도 내 얼굴은 웃는 표정을 그려놓은 벽돌 같았을 거다.

"걱정할 것 없어요. 하면 다~ 해요."

마음을 읽혀 부끄러웠지만 부드러운 아우라에 긴장이 약간 누그러졌다. 오랜만에 마주한 편의점 포스 시스템은 그간 첨단기술을 갖추어 받을 돈, 내줄 돈까지 딱딱 화면에 보여주니 커다란 다행이기도 했다.

당연하고도 당연하게 실수는 많았다.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점포 문을 박차고 나갔다. 답답해서 나간 건 아니고, 손님이 나간 뒤에야 결제 실수를 깨닫고 "손님!!!" 하고 포효하며 튕겨나간 거다. 초 단위 기다림에 민감하신 담배 손님께 무중력의 속도로 응대해서, 담배로 답답함을 풀어보고자 온 분들을 복장 터지게 하는 무례도 왕왕 저질렀다.

나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날 공격하거나 비난할까 봐 무서웠다. 방문 후기에 불평을 쏟아내거나, 사장님께 슬쩍 내 흉을 보거나, 동네에 소문이 돌게 하는 상상을 했다. 교대할 근무자가 옆에 서 있을 때 손님이 와도 머릿속이 하얘졌다. 누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평가받는 기분에 휩싸여 손가락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참 신기했다. 진상 손님 천태만상을 각오했는데, 손님들은 내 실수에 대부분 너그러웠다. 내가 워낙 굽신거리기도 했지만 감정기복에 굴복해 웃음기 하나 싣지 못할 때도 그랬다. 농담을 걸며 웃음을 주는 분도 많고,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내게 방금 산 물건을 나눠 주는 분들도 계셨다. 물론 모든 손님들과의 만남이 기분 좋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이 그랬다는 말이다.

이상했다. 이제 좀 본격적인 스트레스가 있어야 하는데? 업무공책에 적힌 말 한마디에도 부정적 상상을 부풀리곤 했지만, 나 외에는 아무도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하나 팡 터지려고 그러나. 모든 게 평화로우니까 그건 또 그것대로 불안했다.

세 달쯤 지나자 비로소 마음 놓고 생각했다. 정말 '궁극의 일자리'가 있다면 여기가 그에 가장 가깝다고. 운이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 있나? 나는 혼자 일하며 웬만한 실수는 스스로 수습하면 됐고, 업무는 공책에 필담으로 전달 받아 흘려 들을 일이 없었다.

물건 입고 대신 청소와 매대 정리를 맡은 것도 행운이었고, 옛날과 달리 짬짬이 앉을 수도 있어 힘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운이었다. 번화가 대형 점포의 야간 시간에 일했다면 이런 얘기를 할 수는 없었을 거다.

그런데 여기가 궁극의 일터였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놀라지 마시라. 세상에는 '알바들이 힘들까 봐 일을 더 하는 사장'이 실재한다. 사장님 부부는 닮고 싶은 어른이었다. 점포 사정이 어렵고 두 분 몸이 더 안 좋으신데도 늘 알바들 건강부터 걱정하셨다.

내가 받은 배려를 여기 다 적을 수는 없지만, 대타로 내가 물류박스를 나르게 될 때는 매번 미리 발주량을 줄여 주시던 것, 청각과민증으로 점포 내 음악소리가 힘들 때 흔쾌히 음악을 끌 수 있게 해 주신 것이 나는 참 감사했다. 

의욕이 과해 눈치 없는 실수를 반복할 때도 도움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을 더 봐 주셨고, 부족한 점을 지적할 때는 업무공책에 부탁 형식으로 적어두시는 게 다였다. 종종 선물을 받아 감사 인사를 드리면 꼭 이런 말이 돌아왔다.

"덕분에 주말에 마음 놓고 쉬어요. 항상 고마워요. ^^"

그런 친절은 알바가 일을 잘해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 이런 데도 있구나. 이런 분들도 있구나. 평생 여기서 주말 알바하면서 글쓰고 살까? 결국 거취 문제로 그만두게 됐을 때는 정말 많이 아쉽고 죄송스러웠다.

작은 안전감의 반복

일터로 헤아려보면 지금까지 40여 곳에서 이런저런 단기 노동을 했다. 그런데 왜 이 편의점에서 제일 행복했는지 생각해 봤다. 처음에는 여력이 다한 나를 구제해 줘서, 일이 편해서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도 맞지만, 그것뿐이었다면 다행과 안도를 넘어 행복감을 갖진 못했을 거다.

작은 안전감들이 반복되고, 사소한 선량함을 꾸준히 마주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인간계라는 '복잡계'에서 ADHD라는 통제 불가능성을 가지고 살면서, 위험도를 낮추고 나를 방어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편의점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내 부족함을 물질로라도 메워보려고, 요구하지도 않은 손님들께 내 돈으로 굳이 서비스를 드리면서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잠시 나에게 다가왔다가 평온하게 멀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루하루 나에게 쌓였다. 나는 자주 손님의 말을 못 알아들었지만 정해진 말 몇 마디로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고, 손놀림이 느려서 불평을 듣긴 해도 기다려 주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걸 직접 확인했다. 마음에 둘러친 벽의 두께가 종잇장 한 겹만큼씩 줄어들었다. 내가 쓸모없지 않다는 생각이 커졌다.

'누군가 나를 믿어준다는 느낌'에 참 많이 목말랐었다. 그런 면에서 가장 큰 지분은 사장님들께 있다. 결과에 따라 조정되는 믿음은 쉽다. 하지만 살갗에 닿는 안정감을 주는 건 의외로 어렵다. 

그걸 해내는 두 분을 보면서 생각했다. 믿음의 핵심은 '존중'일 거다. 상대방의 모습, 행동, 판단에는 그럴 만한 연유가 충분했으리라고 여기는 마음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막연하게 "나는 너를 믿는다"고 할 때, 그건 기대되는 성과를 믿는다는 게 아니라 "너의 이유들을 존중한다"는 의미일 거다.

사람의 전체를 받아들이는 마음. 그런 믿음을 받는 사람은 점점 단단해진다. 상처를 치유하기도, 잠재력을 꺼내기도 쉬워진다. ADHD 환자들의 실수를 주변에서 무조건 받아줘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노력과 의지, 가능성을 인정받는 환경에서 사람은 누구나 진가를 발휘한다.

다시 이 질문으로 돌아간다. 뭐 해 먹고 살까? 지금은 글만 쓰지만, 나중에 궁극의 알바 자리를 새로 찾아내기가 쉽지 않을 거다. 그런데 이제 "설마, 하나도 없겠어"란 생각도 슬쩍 든다. 내가 받은 호의와 환대 덕분이다. 그런 장소, 그런 사람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걸 겪었으니까. 적어도 그 온기에는 24시간 불이 켜져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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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10화는 2월 9일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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