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봉길의 한반도평화워치] 미·중 한쪽 편드는 건 단견, 때론 '노' 할 수 있어야
인도·태평양시대와 한국 외교
나는 몰디브로 가는 길에 스리랑카를 경유했다. 도처에서 인도양으로 뻗어 나오는 중국의 힘이 느껴졌다. 수도 콜롬보의 한쪽 해안에는 최첨단 고층 빌딩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안내한 현지 대사관 직원이 설명했다. “중국 자본이 들어와 해변을 매립해 거대한 금융타운을 만들고 있습니다. 제2의 홍콩을 만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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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국익이 최우선 전략, 미·중 한 쪽 편드는 건 단견
과거사 문제로 일본에 더는 사과·배상 요구하지 말아야
인도의 국제안보적 위상 급부상, 2030년 세계 3위권 예상
신남방정책 강화하며 인도와의 협력 획기적으로 늘려야
」
스리랑카 남단의 항구인 함반토타는 중국이 99년간 운영권을 얻어 개발하고 있었다. 해변 별장 위주의 몰디브에서는 드물게 고층 호텔이 건설되고 있는 것도 보았다. 함께 회의에 참석했던 아라비아반도의 오만 대표가 내게 말했다. “중국 자본이 건설하고 있는 겁니다. 오만에도 중국 자본이 들어와 생수 공장을 건설하는 등 하여튼 대단합니다.”
태평양·인도양서 누가 누구를 위협하나
인도양회의 첫 세션에서 해리스 대사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관해 연설했다. “나는 주한 미국대사로서가 아니라 미국의 인도·태평양함대 사령관을 지낸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중략)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약자들을 위협(bully)하고 있습니다. 일대일로(一帶一路, 중국의 육·해상 실크로드)에 참여한 국가들을 과도한 부채 함정에 빠뜨려 주권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연설이 끝나자 청중석의 중국 대표(외교부 경계·해양담당 대사)가 고함을 지르며 따졌다. “남중국해는 명백히 중국의 주권이 미치는 곳이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협한다는 말인가?’(‘Who’s bullying who?’)” 그의 거친 태도는 전형적인 중국의 전랑외교(戰狼外交, Wolf Warrior Diplomacy)였다. 난처한 표정으로 연단에 서 있던 해리스 대사의 모습이 생각난다.
해리스 대사는 서울에서 올 때부터 기분이 나빠 있었다. 한국 외교부에 불려가서 당시 현안이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에 대한 자신의 발언과 관련해 싫은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외교부의 언론 플레이 속에서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의 다른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몰디브로 왔다.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매우 실망했다”는 말을 나에게 여러 차례 했다. 중국과는 국제회의 석상에서 고함이 오가고 한국과는 불편한 미국의 모습이 씁쓸해 보였다.
‘치욕의 세기’ 겪은 중국의 절치부심
2018년 초 ‘한-인도 비즈니스 서밋’ 대표단으로 인도 뉴델리를 방문한 한 재계 인사가 “미국과 중국 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라고 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시는 그레이엄 앨리슨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쓴 『예정된 전쟁』(원제 Destined for War)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상하는 신흥 국가(중국)가 기존 패권 국가(미국)를 대체하려 할 때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충돌(전쟁)이 일어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패권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압도적인 군사력·경제력으로 자기 뜻을 강제할 수 있는 국가란 이야기다. 중국은 2012년 시진핑 주석 취임 이래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중국몽·中國夢)을 비전으로 내세웠다. 청나라 말 ‘치욕의 한 세기’를 감내해야 했던 중국은 도광양회(韜光養晦, 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림)를 버리고 일대일로를 매개로 한 적극적인 대외 팽창에 나섰다.
미국에는 공존과 타협의 메시지를 보냈다. ‘신형대국관계이론’ ‘인류운명공동체론’ 등이 그것이다. 오바마 정권까지 이러한 논리가 어느 정도 먹혀들어갔다. 그러나 2017년 1월 트럼프 정권이 들어서면서 크게 바뀌었다. 트럼프는 미국의 단일 패권을 위협하는 중국의 부상을 그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트럼프의 핵심 전략가들은 미국의 쇠퇴(decline)가 중국의 불공정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무역 전쟁과 기술전쟁이 뒤따랐다. 이러한 기조는 바이든 정부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쿼드 가입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미국은 2017년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을 내세우며 본격적으로 중국 견제에 나섰다. 전통 우방인 일본·호주에다 인도를 끌어들여 4개국 협의체인 쿼드를 출범시켰다. 2021년 3월 제1차 쿼드 정상회의가 화상회의로 개최됐다. 전년도 6월 발생한 인도와 중국의 히말라야 국경 충돌이 인도의 쿼드 참여에 기여했을 것이다.
쿼드 정상회의에서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3개의 실무그룹(백신 전문가, 기후, 핵심·신흥 기술) 출범에 합의했다. 중국 포위와 관련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렇지만 중국은 쿼드를 미국의 인도·태평양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형성 움직임으로 경계하고 있다. 한국 내에서도 성급하게 쿼드 가입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중국과 지척 거리에 있는 한국은 쿼드 4개국과는 지정학적 상황이 다르다. 쉽게 쿼드 가입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지난해 7월 귀국 후 오랜만에 둘러본 연말 서울 명동의 모습은 썰렁했다. 원래 중국과 일본인 관광객들로 붐비던 곳이다. 코로나 팬데믹 여파이긴 하지만 지금 한국의 중국·일본 관계를 보는 듯했다. 지금 우리 외교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인접국 외교다. 중국·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다.
명동의 중국대사관에서 만난 오랜 지인인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 대사는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와 미·중 갈등을 한·중 관계 어려움의 주원인으로 보았다.
인도·중국, 영국·일본에 배상 요구 안 해
미·중 갈등은 한국 외교에 큰 도전인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미·중 어느 한쪽에 줄을 선다는 것은 단세포적 발상이다. 한국이 처한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중국과는 국가 이익에 따라 사안별로 당당히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사드 도입 등 그간의 핫이슈가 모두 우리 나름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결정이었다. 앞으로 있을 베이징 겨울올림픽 참가, 인도태평양전략 대응 등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미·중을 포함해 어느 나라에도 당당히 ‘노’(No)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의 식민지 유산 관련 문제(강제징용 배상과 위안부 문제)도 이제 우리 정부가 주도적으로 해결할 때가 됐다. 더는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대국적 입장에 서야 한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200년이나 받았으나 배상을 요구한 일이 없다. 2015년 인도의 인기 정치인 사시 타루루 의원이 영국 옥스퍼드대 학생회 초청 연설에서 배상 문제를 거론한 것이 처음이다. 그는 영국이 상징적으로 1년에 1파운드씩 200년 동안 지불할 것을 제안했다.
중국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았으나 1972년 중·일수교 공동성명에서 일본에 대한 배상 요구를 포기했다. 당시 중국이 처한 정세 상황을 고려한 결정이었으나 표면적으로는 패전한 일본 국민에게 중국이 이전에 경험한 치욕적 배상의 고통을 지우고 싶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세계 10위권 선진 선도국이 된 한국도 이제 이런 문제를 국내적으로 해결할 때가 되었다.
고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의 제언
또 하나 우리 외교가 인도·태평양시대에 주력해야 할 부분은 인도와의 획기적 관계 강화다. 다행히 문재인 정부 들어 인도에 처음으로 전략적 접근을 시도한 것은 신남방정책의 가장 큰 성과다. 인도는 2030년이면 국내총생산(GDP)이 미국·중국에 이어 세계 3위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나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수도 뉴델리의 무굴제국 성곽 레드포트(Red Fort) 위 망루에서 10만 청중을 상대로 사자후를 토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나는 마음이 급합니다!”를 후렴구로 끝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인도를 단시일 내에 세계 일등 국가로 올려놓고 싶은 열망이다.
쿼드 핵심 멤버인 인도는 우리의 안보 전략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인도는 항공모함 2척을 보유한 군사 강국이다. 한국과 인도 관계는 역사적인 부채가 없다. 2000년 전 가야의 김수로왕과 결혼한 아유디아의 공주 허황옥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남아있을 뿐이다.
인도와의 협력을 파격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고(故)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는 작고 전 칼럼에서 “인도 뉴델리 한국대사관의 인력을 무모할 정도로 강화해 환인도양 시대에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제기한 비전이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
신봉길전주인도대사·북한대학원대학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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