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 기도꾼 이홍옥 권사님.. "당신은 흔들릴 때마다 중심잡아준 영원한 버팀목"

2022. 1. 1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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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이홍옥 권사가 입원한 요양원을 찾아 위로하고 있는 이현식 목사(왼쪽).


저는 충청북도 제천에서 3대 째 신앙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모태신앙이던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충정로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저는 신앙과 신학사이의 큰 괴리감 때문에 고민하다가 2학년 봄 학기를 마치고, 학교를 그만둘 생각으로 휴학계를 내고 등록금을 가지고 친구와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기숙사에서 내려온 짐을 받아 든 저희 집은 난리가 났습니다.

줄곧 모범생으로 살아온 제가 한 행동 때문에 부모님은 매우 놀라셨고, 그 날부터 제 어머님은 금식과 철야를 되풀이하며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제주도에서 한 달여 생활 끝에 돈이 떨어졌고, 할 수 없이 저는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고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왜냐하면 제 선친은 화가 나면 사정없이 때리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기 전 누나를 먼저 만났고, 누나로부터 “현식이가 집에 몇 시 경에 들어갈 것”이라는 연락을 받은 아버지는 돌아오는 탕자인 저를 사랑이 아닌 몽둥이로 맞이하기 위해 대문을 지키고 서 계셨습니다. “때리면 맞아야지, 난 맞아도 싸” 체념한 체 눈을 감고 서 있는데, 딱딱한 몽둥이가 아니라 따스한 손이 제 목을 감싸는 것이었습니다. 놀라 눈을 떠 보니 어머니께서 저를 안아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그냥 저를 꼭 안아주셨고,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손에 있던 몽둥이를 내려놓고 집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어머니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나왔고 그 눈물은 이내 제 얼굴에서 목으로 흘러내렸습니다.

감리교신학대 졸업식 때 이현식 목사와 부모.


미당 서정주 시인은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의 8할은 바람 이었다”라고 했는데, 돌아보니 지금의 저를 만든 것은 어머니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 한 점이었고, 기도 한 점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는 지금도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다시 일어서게 해주는 자양분입니다. 제 아버님이 53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을 때 제 어머님의 나이는 51세였습니다. 그 전에도 그러하셨지만, 그 후 어머님은 섬기시던 교회의 철야 기도꾼 대열에 합류하시면서 많은 날들을 교회에서 기도하며 지내셨습니다. 늘 기도로 사시던 제 어머님은 1988년부터 목회한 제게 있어 가장 소중한 멘토이셨습니다. 목회하다가 어려움을 만나면 저는 먼저 어머님에게 기도 요청을 했고 때론 어머님이 제게 먼저 기도하다가 받은 응답의 말씀을 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1998년부터 서울에 와서 목회를 했는데 제 어머님은 1년에 두 번 정도 저희 집에 오셨습니다. 오실 때마다 금요일이 되면 다시 꼭꼭 고향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이유는 권사가 본 교회 새벽기도를 많이 빠지면 안 된다는 것과 더불어 며칠 빠지면 늘 앉는 자리에 먼지가 쌓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권사는 주일은 반드시 본 교회에서 성수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으면 하는 마음에 섭섭함도 있었지만 두 가지는 고집스레 붙잡고 계시는 신조인 것 같아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서울에 계시는 동안 저는 식사 시간이 되면 늘 어머님께 식사기도 부탁을 드렸습니다. 이유는 집안의 어른이기도 했지만 어머님의 기도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식사기도 시간에 어머님은 식사에 대한 감사기도는 간단히 하시고, 곧바로 큰아들인 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기도가 참 좋아서 크게 아멘 아멘 하였습니다. 제 기도 후에 제 아내를 위해 그리고 두 아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님의 기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둘째 아들네 4명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셨고, 그 후에는 셋째 아들네와 다섯 남매 총 20명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어머님은 얼마나 강하게 기도하시는지 기도가 끝나고 나면 비말의 흔적들이 밥상 여기저기에 남아있고 밥은 꼬들꼬들해져 있고 국은 식어 있는 등 숟가락을 내려놓아야 할 판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기도 후 저는 감사하게 먹었고, 아내도 식사를 묵묵히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불만을 터트렸습니다. “할머니 침 때문에 더러워서 못 먹겠다. 밥과 국을 바꾸어 달라”고 볼멘소리로 외쳤습니다. “식사기도를 이렇게 길게 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라며 말입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하루는 큰아이가 “오늘은 제가 식사기도 하겠다”고 자원하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 어머님이 다시 우리 집에 오셨습니다. 거실 한 편에 앉아 어머님과 식사를 기다리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들 생각이 나서 “어머니, 저는 어머니의 기도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참 감사해요. 그런데 식사 기도하실 때에는 그냥 감사기도만 짧게 하시지요” 그러자 어머니께서 정색을 하시면서 “나는 눈만 감으면 너희들 5남매 기도가 터져 나오는데”라고 말씀하시는데 나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 우리들이 잘 나서 여기까지 오게 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그냥 눈만 감으면 그 장소가 교회인지 집인지, 식사시간인지 새벽기도회 시간인지 구분하지 않고 우리 5남매, 우리 5남매 하시면서 기도한 우리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구나”하는 생각에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현식 목사가 섬기는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진관교회 예배 모습.


이렇게 제 어머님이 기도의 사람, 기도대장이 된 계기가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건강 문제였습니다. 제 아버님이 39세 되었을 때, 원주 기독병원에서 간경화 말기 판정을 받았고, 한양대 병원에서도 역시 똑같이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때 제 어머님의 나이가 37세였고, 제가 14살 그리고 막내가 5살이었습니다. 우리 가정에 큰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위기 앞에서 제 할머니로부터 기도의 신앙을 전수받아 기도하시던 제 어머니는 교회로 달려가셨습니다. 금식과 철야를 반복하면서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의사는 3개월 밖에 못 산다고 합니다. 제가 욕심 부리지 않겠습니다. 우리 막내아들이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3년만 생명 연장시켜 주십시오” 그러나 점점 아버지의 배에는 복수가 차오르고 얼굴에는 짙은 황달이 끼고 여러 차례 혼수상태가 찾아왔습니다. 계속 매달려 기도했지만 차도도 응답도 없었습니다. 작은 아버지께서 장례 준비를 하자고 했지만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교회로 가서 철야기도 하면서 새벽을 맞이했습니다. 불 꺼진 새벽에 어머니께서는 또 하나님께 “하나님, 3년만 살려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 빛이 비추더니 주님의 음성이 어머니의 마음에 들려 왔습니다. “딸아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노라”

그 후 아버지의 병세는 조금씩 호전되었고 얼마 뒤 다시 휴직했던 직장에 다시 복직을 하고 잃었던 신앙을 되찾아 열심히 신앙생활하며 권사님으로 충성하다가 1989년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나라에서 만나자”는 말씀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3개월 밖에 못 살 것 이라던 아버지는 14년을 더 사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5남매를 양육해야 할 어머님에게는 수없이 많은 어려움이 찾아왔는데, 그 때마다 어머님이 되풀이하셨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때 내 기도 들으시고 역사하신 하나님은 이번에도 내 기도 들으시고 역사하실거야” 그렇게 어머니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기도로 풀어나가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이 찾아왔습니다. 건강하시던 어머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신 것이었습니다. 반신불수가 되었고 재활병원을 거쳐 요양원에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종종 가서 뵙게 되면 늘 밝게 웃으면서 “이곳이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란다”라며, 계신 그곳을 성소 삼아 늘 기도하셨습니다.

지금은 연세도 높으시고 몸의 상태도 많이 좋지 않아 마음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제 마음이 든든한 것은 늘 기도하시는 어머니, 나중에 천국에 가서도 기도하실 기도대장 어머니 때문입니다. 저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산골 목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목회와 삶의 여정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불러온 어머님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돌아온 탕자가 되었을 때 목을 안고 눈물로 기도해주셨던 어머니, 밥상머리에서 침 튀겨가며 기도하셨던 어머니, 비록 지금은 이전 날의 그런 기도의 모습은 아니지만 휠체어에 앉아 계실 때에도, 병상에 누워 계실 때에도 늘 여전히 기도하시는 어머님은 제 인생과 목회의 최고 후원자요 지지자이십니다. 일생 동안 기도를 몸으로 살아내신 어머니의 그 모습을 기억하며 “우리 어머니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내 기도도 들으시고 응답하실 거야” 이 확신을 가지고 어머니처럼 기도로 무릎으로 이 한 해를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어머니, 이홍옥 권사(84)님!

이현식 진관교회 목사
필자 프로필
이현식 목사는 서울시 은평구에 소재한 진관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교회선교연구소 이사장, 학교법인 배화학원 이사장, 웨슬리전도학교 교장, 감리교신학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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