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노동자·성폭력 피해자.. 목회는 약자를 향한 여정"

박용미 2022. 1. 11.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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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셔널 처치' 실천 힘쓰는 송태근 삼일교회 목사
송태근 삼일교회 목사가 지난달 23일 서울 용산구 교회에서 사회 속으로 들어가 약자와 함께하는 미셔널 처치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석현 인턴기자


홀어머니와 살던 가난한 고등학생이 교회 수련회에 가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 순간 예수님을 믿기 전에 돌아가셨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이제 우리 아버지에게는 기회가 없구나, 앞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라 지옥에 가는 일이 없도록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 송태근(66) 삼일교회 목사가 평생을 주님께 헌신하게 된 계기였다.

그 후 송 목사의 삶은 장애인, 노동자, 성폭력 피해자, 노숙인 등 약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는 것으로 점철됐다. 지난달 23일 서울 용산구 교회에서 만난 그는 “내가 원해서 일부러 그들을 찾아갔던 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등을 미셨다”며 “그들로 인해 내가 성장했고 그들로부터 오히려 많이 배웠다”고 회상했다.

1977년 총신대에 입학한 송 목사는 거처가 없어 당시 출석하던 교회 장의자나 고향에 내려간 학교 기숙사 친구들 방에서 쪽잠을 청하곤 했다. 그러다 생계를 위해 국립맹학교 성경 교사, 한국맹인교회 사찰과 전도사 등을 거치며 13년간 장애인을 섬겼다. 그는 “당시 만난 장애인들에게 항상 빚진 마음이 있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 내가 스토리텔링 식의 설교자로 준비된 시간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됐다”며 “사물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다 보니 다른 설교보다 고민이 몇 배는 컸다. 훗날 내 언어체계가 달라져 있었다”고 말했다.

도봉구 신창교회 중등부, 서대문구 동산교회 대학부, 동작구 강남교회 대학부에서 사역했던 송 목사는 총신대 신대원 졸업 후 88년 서울 강남구 충현교회에 이력서를 냈다. 당시 충현교회는 목회자를 영어 상식 설교 등 시험을 통해 뽑았는데 127명이 지원할 정도로 경쟁률이 치열했다. 그는 뽑히고도 어리둥절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장애인 사역 등 내가 먹고살기 위해 했던 실전 사역들이 점수를 높게 받았다고 하더군요. 하나님께서 먼 길을 돌아 큰 은혜로 갚아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송 목사가 충현교회에서 맡았던 부서는 ‘직장전도교육부’로 학교에 다니지 않고 일하던 소위 ‘공순이, 공돌이’를 섬기는 부서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또 한 번 느꼈다. 그 역시 고등학생 시절 ‘공돌이’였다. 휴학과 자퇴를 반복하며 반창고 공장, 염색 공장, 새 파는 가게, 인쇄소 등에서 일했다. 그는 “충현교회가 충무로에 있다가 강남구로 예배당을 옮겼는데 예수님에 대한 열정으로 강남까지 주일 예배를 드리러 온 아이들이 많았다”며 “아이들 교적부를 들고 경기도 포천, 일산, 성남 등지를 찾아다녔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예수님을 향한 소망을 두고 사는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설명했다.

송 목사는 92년 미국 코리안채플(LA한인교회) 담임으로 사역했다가 94년 8월 강남교회의 부름을 받아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노량진에 있는 교회 특성상 고시생들에게 아침밥을 해먹이며 말씀을 가르치다 보니 햇수로 19년이 흘렀다. 교회도 부흥하고 안정적이었다. 전병욱 당시 삼일교회 목사 성추행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삼일교회 청빙위원들이 매 주일 예배에 와서 말도 없이 앉아만 있다 돌아갔습니다. 수많은 청년이 흩어지기 시작하는데 너의 일신만 편하면 되겠냐는 말도 들려왔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동안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는 생각도 했고 교회가 목사 한 사람에게 의존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하던 차였습니다. 당시 강남교회 성도들을 어떻게 뿌리치고 돌아섰는지 그 고통과 상처가 아직도 어제 겪은 일같이 생생합니다. 성도들에게 지금도 미안할 뿐입니다.”

송 목사는 2012년 삼일교회에 와서 교회와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보듬었다. 피해자들의 소송을 도왔고 교회가 이례적으로 금전적인 피해 보상도 했다. 기독교반성폭력센터를 세워 재발 방지에도 힘썼다. 당시 사람이 손댈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었던 청년들을 위해서는 말씀만이 답이라는 생각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강해를 이어갔다. 그리고 약자들을 돌보는 긍휼 사역을 시작했다.

“부임 직후 청년들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실 거냐’고 묻더군요. ‘너희들을 낮고 비천한 현장,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길로 안내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한 번도 그 걸음을 흐트러트리지 않으셨습니다.”

지난해 설립한 미셔널신학연구소도 그 일환이다. 그동안 삼일교회가 추구해온 ‘선교하는 교회’와 ‘세상의 이웃이 되는 교회’의 경험을 신학적으로 정리해 한국교회와 나누는 사역이다. 일례로 삼일교회가 노숙인들에게 먹을 것과 머물 곳을 마련해주고 취업 교육과 일터까지 제공했던 것도 송 목사가 평생 지속해온 미셔널 신학의 실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마음에 약자를 담고 계십니다. 저의 목회 여정을 돌아보면 제가 대단한 비전이 있어 낮은 곳으로 간 것이 아니었음에도, 약자들을 위해 사역했던 이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낍니다. 생명과 구원과 회복의 역사는 언제나 약자를 환대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한국교회가 가난한 자들과 함께 세상 속에 자리매김하는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박용미 기자 m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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