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영준의 시시각각] 차악(次惡) 감별 선거에서의 TV토론
네거티브 선거에 정책 대결 묻혀
그럴수록 중요한 유권자의 감별력
2017년 대선 때의 일이 기억난다. 당시 문재인 민주당 후보는 “81만 개의 공공 일자리를 만들겠다. 1년에 4조원이면 된다”고 했다. TV토론 때마다 이 공약의 허점을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가 파고들었다. 공무원 초임을 들어가며 엉터리 계산이라고 따지자 문 후보는 제대로 반론을 못 하다 “정책본부장과 토론하시는 게 좋겠다”고 빠져나갔다. 문재인 정부 4년 반 동안 발표된 고용통계만 보면 일자리 창출 공약이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지난해 9월 통계청은 1년 전보다 일자리 67만1000개가 늘어 역대 최다 증가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 숫자는 알바 거리도 안 되는 노인복지 차원의 일자리만 늘려 놓았을 뿐 왕성하게 경제활동을 해야 할 청년들이 양질의 일자리를 찾기란 로또 당첨보다 더 어려운 실상을 가리고 있다. 눈 밝은 유권자들은 5년 전 TV토론 때 이미 문재인표 고용의 본질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되돌아보니 고용뿐 아니라 부동산, 탈원전, 최저임금제 등 문재인 정부 내내 비판의 표적이 된 정책들이 이미 그때 도마에 올랐다. 거대한 촛불의 물결에 정책 공방이 묻혔다는 점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정책 대결 실종’. 1987년 이래 모든 대선 때마다 한국 신문에 등장하는 단골 기사 제목이다. 흠집 거리가 많은 후보들이 선두를 다투는 이번 선거는 유독 네거티브 경쟁이다. 그래도 후보들의 정책에 목말라 하는 유권자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 경제 전문 유튜브 채널의 후보 연쇄 인터뷰에 쏟아진 관심이 이를 말해 준다. 해당 채널이 "나라를 구했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유권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기성 미디어 종사자로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대목이다.
이제는 본격적인 TV토론이 열릴 차례다. 윤석열 후보가 소극적이던 입장에서 돌아섰으니 2월로 예정된 법정 토론까지 기다릴 것 없이 후보 간 대면 토론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찍을 사람 정해 놓았고 바꿀 마음이 없다는 유권자 비율이 70%를 넘는데 무슨 대수냐는 반론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그건 일면만 본 것이다. 진영 논리에 갇힌 유권자, 팬덤으로 뭉친 열성 지지자들의 마음은 TV토론에 흔들리지 않겠지만 실제로 대선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은 아직도 뽑을 사람을 정하지 못했거나, 앞으로 지지 후보를 바꿀 가능성이 있는 유권자들이다. 그런 유권자들에게 판단의 기회를 제공하는 장이 TV토론이다. 다만 역대 선거에서 TV토론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영화·드라마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콘텐트 제작 역량이 무색하게 한국의 TV토론 수준은 낙제점이었다. 후보별 시간 배분에 기계적 균형을 지켜야 하는 제약과 현장 상황에 대응하지 못하고 토론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진행방식 등등의 문제들이 밀도 있는 토론을 방해하는 요인들이었다. 또 양자 대담이 아니라 다자 좌담회 형식이어서 토론이 산만해지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근본 문제는 연출보다 배우(후보)들의 수준과 능력과 의지다. 후보들은 유권자의 바람과 기대에 부응할 의무가 있다. 토론을 회피하는 자는 유권자의 선택을 받을 자격이 없다.
물론 대선은 말 잘하는 사람을 뽑는 웅변대회가 아니다. 어눌하고 디테일에 약하더라도 옳은 방향을 제시하고 진정성이 담긴 호소를 하는 후보를 유권자는 능히 알아본다. 누가 거짓을 진실로 포장해 혹세무민하는지도 가려낼 수 있다. 유권자의 눈높이에서 볼 때 이번 선거는 최선은 언감생심, 차선도 아니고 누가 덜 나쁜지를 가리는 차악(次惡) 감별 선거가 돼버렸다. 그래도 차악을 가려내는 감별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유권자의 감별력마저 무너지면 차악이 아니라 최악이 뽑히게 된다. 그것만큼 치명적인 불행이 어디 있겠는가. 두 눈 부릅뜨고 TV토론을 지켜보고 검증에 검증을 거듭해야 할 이유다.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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