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그날엔..] 혼돈의 '잡탕 정치', 그해 8월 도대체 무슨 일이..

류정민 2022. 1. 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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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대통합민주신당 탄생의 우여곡절 역사
대선승리 욕망으로 급조된 정당, 유권자 외면 자초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편집자주 - ‘정치, 그날엔…’은 주목해야 할 장면이나 사건, 인물과 관련한 ‘기억의 재소환’을 통해 한국 정치를 되돌아보는 연재 기획 코너입니다.
국회의사당. 사진=아시아경제DB

‘미래창조대통합민주신당’. 이런 정당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다면 “정치를 좀 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만약 미래창조대통합민주신당이 어떤 이유로 탄생했으며, 어떻게 변화했는지(사라졌는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당신은 ‘정치 고수’다.

미래창조대통합민주신당 창당 준비위원회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그들 중 일부는 지금도 여야 대선레이스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미래창조대통합민주신당, ‘미래’와 ‘창조’, ‘대통합’과 ‘민주’, ‘신당’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어를 조합한, 그 덕분에 정체성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그 정당은 누가, 어떤 이유로 창당하려 한 것일까.

한국 정치사에 분명히 기록을 남겼지만, 현재는 대다수의 기억에서 사라진 그 정당의 사연을 알기 위해서는 2007년 8월, ‘혼돈의 시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해 8월 한국정치에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해를 돕는 핵심 키워드는 ‘대선’이다. 대선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그렇게 모이지도 않았고, 혼란스러운 8월을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미래창조대통합민주신당 창당 과정에 참여한 정치인들은 ‘잡탕정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다양한 인물이었다.

열린우리당 탈당파가 참여했고, 통합민주당 탈당파도 참여했다. 한나라당 탈당그룹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쪽 인사들도 함께 했다. 시민사회그룹도 있었고 참여정부에서 역할을 했던 인물들도 동참했다.

2007년 7월24일 미래창조대통합민주신당 창당 준비위를 구성한지 12일 만에 창당 대회를 가졌다. 2007년 8월5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창당대회를 열었고 정당명은 ‘대통합민주신당(약칭 민주신당)’으로 정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사람들이 대통합민주신당이라는 이름은 알아도 미래창조대통합민주신당이라는 이름은 생소한 것도 이 때문이다. 초고속 창당 과정에서 ‘미래창조’라는 단어가 빠졌다. 사실 대통합민주신당도 이름이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무엇을 위한 대통합인지, 민주신당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중들은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대통합민주신당의 창당 명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모든 미래세력이 과거 회귀세력과 대결하는 전선에 집결해야 한다.”

‘과거 회귀세력과의 대결’을 창당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스스로는 미래세력으로 규정했다.

정치적 수사를 동원했지만 본질은 권력이었다. 한나라당에 권력을 내줄 수 없기에 모든 이가 힘을 모으자는 게 수면 아래에 가려져 있던 명분이었다. 서로의 정치 지향점이 달랐던 이들이 권력을 움켜쥐고자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인다면 국민은 그들의 손을 잡아줄까.

사실 대통합민주신당의 정치적 운명은 창당 당일부터 예견돼 있었는지 모른다.

대통합민주신당은 그 해 8월,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는 열린우리당의 몰락과 맞물려 있다. 열린우리당은 2007년 8월20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통합수임기구 합동회의’에서 흡수통합 형식으로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열린우리당은 법적 소멸 과정을 밟게 됐고, 당원 명부와 자산 등은 대통합민주신당이 흡수하는 형식이었다. 열린우리당 본진마저 대통합민주신당과 함께하면서 단숨에 143석의 원내 제1당으로 몸집을 키웠다.

대통합민주신당은 창당 한 달도 되지 않아 원내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지닌 정당이 됐다. 대통합민주신당은 그럴듯한 외형을 갖췄지만 앞길은 첩첩산중이었다.

한나라당 집권에 반대하는 모든 이가 힘을 모으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그들의 기대가 무너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대통합민주신당은 권력을 갖겠다는 뚜렷한 욕망은 있었지만 국민이 왜 자신들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정치적인 몸집은 키웠지만 내부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운 관계였다.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키고자 ‘후보 단일화’ 카드를 꺼냈지만, 결실은 보지 못한 채 갈등의 불씨만 키웠다.

국민은 대통합민주신당의 구애작전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는 617만4681표(득표율 26.1%)를 얻는데 그쳤다. 한나라당 대선후보보다 500만표 가까이 적게 얻은, 말 그대로 ‘참패’였다. 그해 8월의 분주했던 움직임에 대한 유권자의 최종 평가는 싸늘했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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