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건축가들 韓 모였다..3만명이 화성 벌판에 만든 기적

한은화 2022. 1. 8.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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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시 남양성모성지의 대성당. 설계부터 완공까지 10년이 걸렸다.[사진 김용관 작가]

경기도 화성시 남양성모성지에서는 지금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건축ㆍ조경ㆍ조각 등 분야별로 국내외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한 데 모여 허허벌판을 문화 성지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서울 강남 교보타워를 설계한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 ‘건축가들이 가장 존경하는 건축가’로 꼽히는 스위스 건축가 페터 춤토르, 이탈리아 조각가 줄리아노 반지, 한국의 승효상ㆍ한만원ㆍ이동준 건축가와 정영선 조경가 등이 이 장소를 만드는데 몰두하고 있다.

건축주가 재벌이라도 되는 걸까. 유명세와 프로젝트 규모를 보면 작가비만으로 수십억 원을 써도 이들을 한데 모으기 어려웠을 터다. 그런데 대다수 작가가 실비 수준의 비용만 받고서, 최장 10년 넘게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건축주는 3만명이 넘는다. 월 2만원씩, 50개월 기부에 나선 천주교 신자들이다.

남양성모성지는 병인년(1866년)에 박해를 받고 처형된 무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위한 순교지이다.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1983년부터 성역화가 시작됐고, 1989년에 이곳에 부임한 이상각 신부가 건축주 대표로 30년 넘게 이 프로젝트를 끌어가고 있다.


올해로 34년차 건축주 대표, 이상각 신부


집 한 채만 지어도 늙는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건축주의 일을 이 신부는 30년 넘게 해오고 있다. 마리오 보타는 최근 본지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작은 신부님이 오로지 정신적인 가치에 집중하면서 성장하는 거대 도시 옆에서, 소비사회에서 이런 종교적인 공원을 완성해낼 수 있다는 것이 매우 놀랍다”고 전했다.
남양성모성지는 9만956㎡에 달하는 거대한 공원이다. [사진 김용관 작가]

이 신부가 성지 조성 임무를 맡고 1989년 부임했을 때 성지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땅은 아카시아 나무만 듬성듬성하게 있는 골짜기이자 농지에 불과했다. 당시만 해도 법상에 성지 개념은 없었다. 도시계획지구 내에서 자연녹지를 종교용지로 바꿀 수 있는 규모는 9917㎡(약 3000평)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신부는 대규모 성지 조성을 위해 계속해서 땅을 확보해 나갔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들이 신부를 고발하기 시작했다. 90년대부터 10년 넘게 이어진 고발세례에 신부는 피의자 신분으로 법정에 서기도 했다. 결국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도시개발법이 개정되면서 법적인 문제가 해결됐고, 성지를 만들 수 있게 됐다. 현재 성지의 대지 면적은 9만956㎡에 달한다. 그 막막한 세월 동안 왜 포기하지 않았을까. 최근 남양성모성지에서 만난 신부는 이렇게 답했다.

“87년에 계곡에 빠져 죽을 뻔한 일이 있었어요. 그날 어머니의 꿈에 성모마리아가 나오셔서 ‘네 아이 중 한 명을 데려가겠다’고 말씀하셔서 어머니가 옷자락을 붙잡고 울며 말리셨대요. 이 꿈을 세 번이나 연달아 꾸셨다니, 결국 성모마리아가 나를 살리신 거죠. 이후 성모마리아를 위한 일을 하겠다고 굳게 서약했고, 우연히 이곳에 부임했어요. 그러니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묵묵히 하는 겁니다.”

이상각 신부와 조각가 줄리아노 반지, 마리오 보타의 모습(왼쪽부터).[사진 HNS건축사사무소]


대성당의 건축가, 마리오 보타


땅 문제가 해결되고 처음 들어선 건물은 대성당이다. 2011년 6월 성도의 소개를 받아 마리오 보타에게 대성당 건축을 의뢰했더니, 두 달 만에 하겠다는 답신이 왔다. 그리고 또 두 달 뒤 건축가는 건물 모형을 들고 방한했다. 설계 의뢰를 하면 답신하기까지 1~2년가량 뜸 들이기로 유명한 이의 이례적인 행보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중에서 마리오 보타는 상업적으로도 대성공한 건축가로 꼽힌다. 딱 보면 그의 작품임을 알게 하는, 기하학적인 건물 형태가 주는 상징성 덕이라는 평가가 많다. 동시에 종교 건축물도 많이 설계해 ‘영혼의 건축가’라고도 불린다. 마리오 보타는 “오늘날 교회를 세우는 것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역사의 연속성을 위한 일이고, 또한 풍경에 균형을 주는 일”이라며 “기도의 장소에 들어서면 침묵과 존경의 순간이 저절로 찾아오는데 그때 건축이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신부는 건축가에게 세 가지를 부탁했다. “빛으로 충만하고, 소리가 좋으며, 관리비가 많이 안 드는 대성당을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보타는 “대성당은 디테일이 생명이니, 서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부에서 바라본 타워의 상부. 해의 위치에 따라 빛의 모양이 시시각각 변한다. [사진 김용관 작가]
대성전의 모습. 천장의 트러스 구조에 소리가 고이지 않고 통과하도록 목재 루버를 설치했다. [사진 김용관 작가]

설계하는 데만 꼬박 5년 걸렸다. 건축가는 성지의 끄트머리 골짜기에 마치 댐처럼 대성당(건축면적 4953㎡)을 살짝 묻었다. 그리고 앞부분에 52m 높이의 원통형 타워 두 동을 세웠다. 타워의 유리 천장을 통해 내부로 빛이 쏟아지는 ‘빛의 타워’다. 타워 아래에는 제대(祭臺)를 설치했는데, 때론 빛이 천사의 날개 모양을 그려내기도 한다. 타워의 모습이 강렬하다 보니 성지에 도착하면 자연스레 대성당을 향해 걸어나가게 된다. “타워가 이 장소의 풍경을 바꿀 것”이라는 건축가의 말은 현실이 됐다.

대성당뿐 아니라 내부의 작은 안내판부터 의자, 파이프 오르간 디자인, 십자가와 성화 설치까지 세세한 모든 것들이 보타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그는 공사 중에도 1년에 3~4차례 현장을 방문해 계속 수정해 나갔다. 성당이 완공된 지금에도 마리오 보타는 “아직도 이곳에 올 일이 많이 남았다”고 말한다. 내년이면 여든인 노장 건축가의 열정에 모두 탄복했다. 현장에서 회자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보타가 중국으로 출장 가는 길에 비행기를 갈아타느라 인천공항에서 잠깐 머물렀어요. 인사차 나갔던 한국 파트너 사무실 직원이 현장 사진을 보여줬는데 그걸 보더니 바로 성지로 달려왔어요. 대성당 타워 꼭대기에 있는 작은 십자가의 색깔이 거슬렸던 거에요. 결국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 살핀 뒤 수정사항을 말하고 다시 공항으로 가셨어요. 비계를 걸어 내려올 때 힘들지 않냐고 여쭸더니 ‘건축가가 걸어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다’라고 하시더군요. 감동적이었죠.”(이 신부)

대성당의 앞모습. [사진 김용관 작가]
대성당의 뒷모습. [사진 김용관 작가]

대성당은 약 60만장의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벽돌공이 귀해진 요즘인 데다가 대성당에는 벽돌로 쌓기 까다로운 포물선ㆍ 원통 모양의 디테일이 수두룩하다. 이 어려운 현장의 감독을 맡은 이는 한만원 건축가(HNS건축사사무소 대표)다. 그는 남양성모성지의 총괄건축가이자, 대성당의 실시설계와 감리를 맡아 보타와 함께 10년을 뛰었다. 벽돌 치수를 3차원으로 그려 일일이 계산해 벽돌을 잘라 쌓았다. 어긋나 보이는 벽돌은 뜯고 다시 쌓기도 했다. 한 소장은 “철판 두께를 2㎜로 할 것이냐 3~5㎜로 할 것이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데 그런 것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도록 현장에서 결정하느라 애먹었다”고 말했다.


순교지에서 치유의 땅으로


대성당의 제단에 걸린 십자가 조각과 성화 ‘최후의 만찬’과 ‘수태고지’는 이탈리아 조각가 줄리아노 반지의 작품이다. ‘20세기 미켈란젤로’라고도 불리는 그에게 작업을 부탁한 것도 마리오 보타였다. 대성당 제대 상부에 걸린 높이 3m, 길이 10m의 성화 두 점 모두 뒷면이 그려져 있다. 최후의 만찬 중인 예수와 열두 제자의 뒷모습,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받는 마리아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대성당 제대의 모습. 타워의 천창과 십자가 뒤 열린 틈으로 빛이 쏟아진다. [사진 김용관 작가]
줄리아노 반지가 그린 성화 '최후의 만찬'의 뒷모습. [사진 남양성모성지]

그런데 대가는 작품료로 재룟값 수준만 받았다고 한다. 이 신부는 “‘대성당을 왜 짓는지 알고 있고 최소의 비용만 요구하겠다’고 하셨는데 정말 최소였다”며 “십자가와 그림을 현장에서 설치하는 비용이 더 많았을 정도”라고 전했다. 마리오 보타는 “한국 교회에 주는 반지의 선물이라고 생각해달라”고 전했다. 그 역시도 설계비로 사무실에서 작업하는 직원들의 비용 수준만 청구했다. 신부의 선하고 굳건한 의지가 만든 기적 같은 일들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아직도 성지에는 가야 할 길이 한참 남았다. 페터 춤토르의 ‘티하우스’와 승효상 건축가의 ‘순교자의 언덕’, 이동준 건축가의 ‘평화 문화 나눔센터’가 지어지고 산책로 등 조경도 다듬어질 예정이다. 이 신부는 “작은 사람들의 작은 정성이 모여 여기까지 왔다”며 “힘들고 지친 현대인들이 이곳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순교지에서 치유의 땅으로, 남양성모성지는 힘든 시절을 기적처럼 딛고서 모두에게 희망을 건넬 채비를 하고 있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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