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버블
세계적인 명품 매장이 늘어선 3차원(3D) 가상현실 공간. 아바타를 조작해 매장 한 곳을 골라 들어간다. 매장을 둘러보면 코트, 니트, 남방, 바지, 치마부터 핸드백과 스카프까지 세상의 모든 명품 의류·잡화가 전시돼 있다. 이곳에서 제품을 360도로 돌려보고 확대·축소하며 디자인을 꼼꼼히 살피거나 아바타에 입혀보는 것이 가능하다.
아바타를 따라다니는 가상현실의 인공지능(AI) 점원은 친절하게 제품을 설명하고 코디를 제안한다. 제품에 대해 물어보면 대답도 척척 돌아온다. 현실 세계의 백화점이나 의류 매장에선 점원이 말을 걸며 다가오면 왠지 부담스러운데, AI 점원에게는 ‘사지 않고 나갈 수도 있다’는 미안함을 느낄 필요가 없다. AI 점원은 먼저 말을 걸지 않고 따라다니기만 한다.
가상현실의 매장에선 개·폐장 시간이 없다.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에 문득 사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가상현실 공간으로 들어가 매장을 둘러보면 된다.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밀라노, 미국 뉴욕 5번가를 돌아다니는 기분도 낼 수 있다. 원하는 물건을 찾으면 신용카드 번호를 입력하고 결제하면 된다. 제품은 2주 안에 집으로 배송된다.
이것은 1999년 개장한 글로벌 전자상거래 기업 부닷컴(boo.com)의 가상현실 명품 쇼핑몰 이야기다. 이젠 너무나도 익숙한 메타버스 쇼핑몰은 이미 지난 세기 말에 구현됐다. 부닷컴은 1990년대 초중반에 출범한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이나 이베이의 후발 주자로서 더 특별한 고객을 모으기 위해 가상공간에 명품 쇼핑몰을 운영했다.
3D 공간의 참신함, 명품의 화려함에 먼저 매료된 건 기업과 재벌이었다. 루이비통, 베네통, DKNY 같은 의류 브랜드가 부닷컴 3D 매장에 입점하겠다고 앞다퉈 돈을 내밀었다. 당시 제대로 구현된 적이 없는 3D 쇼핑몰은 소프트웨어 기업엔 기술력을 과시할 기회였다. 미국 IBM과 휴렛팩커드 같은 당대 최고 정보기술(IT) 기업이 부닷컴에 협력을 제안했고, 결국 스웨덴 업체 에릭슨이 웹사이트 개발권을 획득했다. 부닷컴 공동 창업자인 에른스트 맘스턴은 스웨덴 국적자다.
소비자의 아바타를 따라다니는 AI 점원의 헤어스타일과 발언 문구 하나하나를 제작하기 위해 세계 최고의 헤어스타일리스트와 카피라이터가 따라붙었다. 부닷컴 TV 광고를 제작한 건 할리우드 거장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아들 롤랜드다. 이 모든 투자와 협업을 가능하게 만든 건 미국 최대 투자은행 JP모건체이스였다.
JP모건체이스는 1998년 느닷없이 찾아와 5쪽짜리 사업제안서를 들이민 맘스턴 등 부닷컴 공동 창업자들에게 선뜻 투자 의사를 밝혔다. ‘닷컴에 투자하면 몇 배로 이익이 남는다’는 당시의 환상은 21세기를 준비하는 산업관으로 여겨졌다. IT·패션 기업들은 제1·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도 유럽 국가들의 채권을 사들이고 군수품을 팔아 이익을 남긴 JP모건의 안목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직 재무제표도 작성한 적이 없는 부닷컴으로 막대한 자본이 몰려들었다. 부닷컴 창업자들은 하루를 멀다하고 경제지와 패션잡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현란한 말이 돈을 불렀고, 그렇게 모인 돈은 투자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줬다. 1999년 3월에 개업한 이 회사는 불과 1년6개월 만에 1억3500만 달러(현재 환율로 1600억원)를 사용했다. 그중 대부분은 홍보 비용이었다.
그리고 찾아온 ‘심판의 날’. 부닷컴은 1999년 11월 의류 판매를 시작했지만 접속률은 25%에 미치지도 않았다. 부닷컴 창업자와 투자자들은 모뎀 사용자가 압도적으로 많아 3D 가상현실을 제대로 구현할 수 없던 당시의 인터넷 환경, 직접 매장을 둘러보며 유행을 체감하길 선호했던 명품 소비자의 소비 경향을 파악하지 못했다. 부닷컴은 2000년 5월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이듬해 시작된 ‘닷컴 버블 붕괴’에 휩쓸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부닷컴은 이제 ‘닷컴 버블’을 설명할 때나 등장하는 이름이다.
산업계와 증권가는 2022년을 메타버스 확장의 원년으로 지목하고 있다. 올해 애플 안경 같은 확장현실(XR) 장비가 속속 등장하면 사무, 금융, 교육 환경이 변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진다. 이 틈에 해외 주식 투자를 위한 국내 계좌는 400만개 가까이 개설됐다고 한다. 반복해서 되묻는 수밖에 없다. ‘화려함에 현혹되지 않았는가’ ‘쇼핑하듯 주식 종목을 담지 않았는가’…. 부닷컴의 실패가 지난 20년간 똑같이 던져온 질문이다.
김철오 온라인뉴스부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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