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 이웃과 함께 걸어온 은혜의 역사 [우성규 기자의 걷기 묵상]
새해 첫 걷기 묵상이다. 지난달 28일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인근에 유관순(1902~1920) 열사의 동상이 새로 제막됐다는 소식을 듣고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으로 향했다. 5번 출구로 나오자 옛 서대문형무소의 붉은 벽돌 담벼락과 육중한 철문이 올려다보인다.
1908년 경성감옥으로 출발한 서대문형무소는 19년 3·1운동 당시 수감 인원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87년 경기도 의왕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수많은 독립 운동가와 민주화 인사들을 사상범으로 가뒀다. 도산 안창호 선생, 김마리아 여사, 남강 이승훈 선생, 몽양 여운형 선생 등 크리스천 독립 운동가들이 사진 속 형형한 눈빛으로 관람객들과 만나고 있다.
황동 빛 유관순 동상은 독립문 북쪽 3·1운동기념탑과 순국선열추념탑 사이에 있다. 맨발의 유 열사가 태극기를 높이 들고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이다. 3·1운동 당시 유 열사는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이었다.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 만세운동과 5일 서울역 앞 시위에 참여했고, 10일 휴교령 이후 고향인 충남 천안에 내려가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직접 만든 태극기를 나누며 매봉감리교회 성도 등과 함께 평화 시위를 이끌었다. 여기서 유 열사의 부모님을 비롯한 19명이 일본 헌병대에 의해 피살된다.
유 열사는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도중 3·1운동 1주년을 맞아 형무소 안에서 재차 옥중 만세 시위를 벌였고 모진 고문을 받다 숨졌다. 일제는 하루 만에 장례를 마친다는 조건으로 시신을 내줬는데, 이때 이화학당 학생들이 각자 소중히 간직하던 비단을 모아 밤새 바느질을 해 삼베가 아닌 비단 수의를 열사에게 입히고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예배를 드렸다.
열사의 동상 뒤편으로 언덕을 오르며 서대문구립 이진아기념도서관을 지난다. 교통사고로 숨진 딸의 이름으로 가족들이 사재를 기증해 설립한 도서관이다. 장애아동과 함께하는 독서캠프, 다문화 세계체험 등으로 전국도서관 운영 평가에서 수위를 놓치지 않는다. 유한한 삶을 영원 속에서 빛나도록 하는 지혜가 돋보이는 곳이다.
도서관 위에서부터 오늘의 하이라이트 ‘안산자락길’이 시작된다. 서대문구가 2013년 전국 최초의 ‘순환형’ 무장애 숲길로 완공한 곳이다. 소외되지 않고 누구나 산에 오를 수 있어서 무장애길이다. 장애인이나 노인은 휠체어를 타고, 아기들은 유모차에 올라 숲을 산책할 수 있다. 북한산 인왕산 남산 한강은 물론 맑은 날은 인천까지도 보이는 걷기 천국이다. 아현감리교회 장로인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은 최근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3선으로 12년째 구청장으로 봉직하며 가장 보람 있던 사업으로 안산자락길 조성을 꼽았다. 문 구청장은 “평생에 처음 자신의 힘으로 숲에서 산책을 해봤다며 눈물을 흘리는 장애인분들을 보며 기뻤다”고 말했다.
안산자락길 능안정 인근까지 걷다가 북아현동 복수천 약수터로 계단을 조금 내려오면 이화여대 후문 산학협력관에 도착한다. 금화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캠퍼스를 거닐며 이대 본관에 다다르면 이화학당 창립자 메리 F 스크랜턴(1832~1909) 선교사의 흉상을 만난다.
여성이 여성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모토로 52세 나이에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를 자원한 스크랜턴 여사는 예일대와 뉴욕의대를 졸업한 엘리트 의사였던 외동아들 윌리엄 스크랜턴(1856~1922)과 함께 내한한 모자(母子) 선교사였다. 미국에서 개업의로서 풍족한 삶을 버리고 한국행을 자원한 이들은 1886년 5월 한 명으로 이화학당을 시작해 배움의 길이 전혀 없던 조선의 여성들에게 새로운 빛을 비췄다. 남녀구별이 엄격했던 당시 최초로 여성만을 위한 전문병원인 보구여관을 세웠고 이는 오늘날 이대병원으로 이어진다. 질병과 가난으로 죽어가던 조선인에게 이들이 조건 없이 약을 나누던 시약소가 오늘날 아현감리교회와 상동교회 자리다. 여성 장애인 노약자 등 억압받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걸어온 기독교의 역사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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