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사러 나가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 그의 마지막 배려

김봉건 2022. 1. 7.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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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13년의 공백>

[김봉건 기자]

마사토(릴리 프랭키)가 세상을 떠났다. 두 아들 요시유키(사이토 타쿠미)와 코지(마츠다 잇세이)가 망자의 장례식장을 지켰다. 하지만 마사토의 아내 요코(킨노 미스즈)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사토의 장례식장을 찾는 손님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조문하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이웃한 또 다른 망자의 그곳과는 대조적이었다.

남은 가족에게 마사토의 생전 이미지는 도박 중독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집 밖에 있는 날이면 마사토는 허구헌날 마작에 빠져 지내기 일쑤였고,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날이면 채권자들의 빚 독촉에 온 가족이 온종일 시달려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사토는 담배를 구입하겠다며 집 밖으로 나간 뒤 그 길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의 부재는 13년 동안이나 길게 이어진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영화 <13년의 공백>
ⓒ (주)영화사 그램 , (주)디오시네마
 
영화 <13년의 공백>은 세상을 떠난 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보이는 현상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에 쉽게 현혹돼 온 현대인들의 편견을 비트는 블랙 코미디 장르의 작품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아버지의 부재는 남아 있는 가족에게 현실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요코가 앞장섰고, 두 아들이 어머니를 도왔다. 이렇듯 13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공백으로 남겨진 가장의 자리는 가족에게는 고스란히 고통으로 전가됐다. 처음엔 그리움이던 아버지를 향한 감정이 원망으로 뒤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한창 성장기인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막내 코지가 간직하던 아버지와의 좋은 추억은 파편화된 짧은 기억으로 간간이 떠오를 뿐, 대부분은 좋지 않은 기억투성이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글짓기 상을 받아온 코지. 기쁜 마음에 이를 알리고자 아버지를 열심히 수소문하였으나 마사토는 여느 때처럼 도박장에서 마작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칭찬하는 둥 마는 둥한 아버지의 시큰둥한 태도에 코지의 들떴던 기분도 금세 가라앉고 만다.  
  
 영화 <13년의 공백>
ⓒ (주)영화사 그램 , (주)디오시네마
 
집을 나간 지 무려 13년 만에 연락이 닿은 아버지. 그는 위암 말기로 시한부 통보를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처지였다.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그의 병문안조차 꺼려했다. 마사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생을 마감한다.

우리는 평소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고, 또 이를 과신해 온 게 아닐까? 영화는 한 아버지의 죽음과 그의 장례식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죽은 마사토의 두 아들은 조문객이 거의 없어 썰렁하기까지 한 아버지의 장례식장과는 달리 손님들로 북적이는 이웃 장례식장을 부러움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곳의 망자가 아버지와는 달리 생전에 잘 살았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떨까. 장례식의 마지막 순서인 망자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차례로 생전의 마사토를 언급하던 조문객들은 한결 같이 그의 훌륭한 인간 됨됨이를 칭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그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이렇듯 마사토의 장례식장을 찾은 몇 안 되는 조문객들은 망자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는 듯했다. 반면 이웃 장례식장을 찾은 수많은 조문객들은 대부분 무표정했고, 심지어 그들 가운데는 돈으로 동원되어 눈물을 뿌리는 가짜 조문객들이 다수였다.  

죽은 아버지가 누구보다 싫고 원망스러웠던 두 아들은 비록 아버지가 무책임하게 자신들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아버지를 알고 지내오던 이들이 그를 훌륭하고 좋은 인물로 기억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혹해한다.

코지는 더욱 심난했다. 형식적인 칭찬 때문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 했던 글짓기 사건. 알고 보니 수상작이었던 당시 그 글을 아버지가 소중히 간직해 온 게 아닌가. 아들의 수상을 어느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했던 아버지다. 
  
 영화 <13년의 공백>
ⓒ (주)영화사 그램 , (주)디오시네마
 
가족들과는 어쩔 수 없이 애증의 관계로 발전하였으나 그가 머물면서 인연을 맺은 주변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 받는 것으로 비춰볼 때 어쩌면 아버지의 부재는 빚 독촉을 받고 있는 자신으로 인해 다른 가족들에게까지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선의에서 비롯된 일종의 배려 아니었을까.

차마 장례식장에는 가지 못 했으나 죽은 마사토를 향해 예를 갖춘 채 "정말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라며 읊조리던 요코의 모습을 통해서도 마사토가 어떤 품성을 지닌 사람인가를 어림짐작케 한다. 

눈 앞에 보이는 현상에만 집착하고 쉽게 휘둘리는 현대인들. 우리들이 보고 믿는 게 과연 전부이고 진실일까? 영화 <13년의 공백>은 장례식의 규모와 조문객의 숫자만으로 한 사람의 삶을 손쉽게 예단하는 우를 범하듯,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으로 가치판단을 내리려 하는 현대인들의 가벼운 성향을 한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위트 있게 꼬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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