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돈'에 대한 강박 벗어나 자유롭게 살았으면"
[김현석 기자]
▲ 성공회대 총장 김기석 신부가 직접 그린 성공회대 전경. 그는 총장 직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틈틈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
ⓒ 김현석 |
섬마을 그림이 완성되었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김기석 신부. 그는 성공회대학교에서 '종교와 과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총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지난해 여름이다.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운영 중인 섬마을인생학교를 둘러보고 도초도와 비금도를 여행하기 위해서였다.
섬마을인생학교(신안군수 박우량, 이사장 오연호)는 시민들이 삶을 잠시 멈추어 쉬면서 자신과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돕는 덴마크형 인생학교다. 입학생들은 도초도라는 섬에 머물며 '인생은 내내 성장기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인생학교 메시지를 공유하고 인생을 설계하는 시간을 갖는다.
"도초도와 비금도가 그림 작업하기에 멋진 공간이 많더군요. 그림을 그려보려 합니다. 완성되면 연락하겠습니다."
김기석 신부는 섬마을을 다녀온 뒤 도초도 신촌마을과 비금도 죽치마을을 유화와 수채화로 그렸다. 두 점의 섬마을 그림이 완성된 후 성공회대 교정에서 김기석 신부를 다시 만났다. 그와 함께 '신영복 추모공원'과 '성미가엘성당' 주변을 산책하면서 또 그의 집무실에서 섬과 도초도, 삶의 전환과 쉼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 김기석 신부와 섬마을인생학교 참가자들이 도초도 시목해변에서 누워있는 모습 |
ⓒ 섬마을인생학교 |
- 처음 뵙던 곳이 목포에서도 1시간 배를 타고 가야 하는 도초도입니다. 어떻게 서남해안 먼 섬까지 발걸음을 하셨나요?
"함께 동행한 이들이 도초도와 섬마을인생학교 이야기를 했어요. 사실 섬에 간다는 게 처음에는 엄두가 나질 않았죠. 그러다가 이준익 감독 영화 <자산어보>를 봤는데 정약전의 유배지가 정말 절경이더군요. 한번 가봐야겠다 싶었어요."
- 도초도에서 섬마을인생학교 프로그램도 참여하셨는데 어떠셨나요?
"처음에는 인생학교가 어떤 교육을 할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직접 가보니 기대를 뛰어넘는 시간이었어요.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가 청소년을 위한 꿈틀리인생학교와 어른을 위한 섬마을인생학교를 이야기하면서 한국사회에 인생설계를 위한 쉬는 시간, 즉 '갭이어'가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는데 굉장히 공감이 됐어요. 우리나라는 청소년들이 얼마나 강박을 받으면서 학교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영국 유학 시절에 저희 아이들 보면 학교 끝나는 3시 이후에는 그냥 친구들하고 놀아요. 그렇게 자연에서 뛰놀고 하는 게 사실 '창조의 원천'이 되거든요. 이건 어른들도 마찬가지고요. 인생에서 쉼과 여유를 통해서 창조성의 토대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섬마을인생학교에 머물면서 '갭이어' 제도를 대학에도 도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은 졸업을 앞두고 진로 모색이나 여러 이유로 휴학하는 학생들이 참 많습니다. 휴학기간 동안 대학이 지도교수를 정해서 멘토링, 혹은 코칭 관계를 맺고 어학연수나 인턴쉽, 여행, 체험, 독서, 취미 개발, 시간 보내는 방법 등을 안내해주는 제도를 만들어보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휴학기간을 훨씬 알차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우리나라는 대학에 진학을 하고 나서 진로를 고민하는 경우가 많아서 대학생을 위한 '갭이어'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신부님께서도 대학시절에 일종의 '전환의 순간'이 있으셨지요?
"저의 경우도 삶의 전환점들이 있었지요. 특히 항공대를 다니던 중에 신학교로 진로를 전환하는 시간이 있었고요. 그때를 돌이켜보면 그간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한 집착, 미래의 진로 같은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었죠.
그럴 때 잠시 멈추거나 쉬는 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쉼은 그 간의 집착을 떠나보낼 수 있는 '틈'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 '쉼의 순간'이 내가 지금까지 하던 걸 아까워하거나 미련을 두지 않고 새로운 결정을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거죠."
- 지난 성공회대 졸업식 축사에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인용하시면서 "종이 조각을 좆는 삶보다는 꿈과 신념을 쫒는 삶을 선택하길 바란다"고 말씀하신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다른 길이 없는 건 아니다'라는 걸 전해주고 싶었어요. 영화감독 톰 새디악이 2010년에 <아이엠>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어요.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답을 찾아가는 건데, 저는 이 작품을 보면서 마치 21세기의 성경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영화감독으로 성공해서 큰 저택에서 살게 됩니다. 그 순간에 허무감이 밀려왔다는 거죠. 도대체 인생에서 중요한 게 뭘까. 이 다큐에서 그런 비유를 들어요. 산속에서 비를 맞으며 길을 잃었어요. 다행히 오두막을 발견하죠. 오두막의 주인이 나와서 맞이해주고 모닥불을 지펴주고 따뜻한 차를 내줍니다. 너무나 감사하죠. 그런데 이 사람이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이 경험이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는 거예요.
같은 맥락에서 '돈'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필요할 때는 생명과 같은데, 필요 이상이 되면 더 이상 효용이 추가되지는 않거든요. 한국사회가 '돈'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서 각자의 꿈을 펼치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셨으면 합니다."
▲ 김기석 신부가 그린 도초도 신촌마을 유화 |
ⓒ 김기석 |
- 섬에서 사진을 많이 찍으셨는데 이후에 도초도 신촌마을 풍경을 그리셨더라고요. 유화 작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도초도 신촌마을은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섬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마을이라고 들었습니다. 도초도에서 유명한 수국도 심어져 있고, 반듯한 수로 옆에 불규칙적으로 집들이 지어져 있었어요. 한 여름날 본 섬마을 풍경인데, 그 공간을 '동화적'으로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주일에 한 번 2시간씩만 작업할 수 있어서 꽤 오래 걸렸습니다."
- 비금도 죽치마을도 캔버스에 옮기셨습니다. 특별히 그곳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비금도에 교사들을 위한 인생학교를 만들 계획이라고 들어서 그 공간을 가보게 됐습니다. 마을 공간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지금도 십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데, 뒤로는 선왕산, 앞으로는 저수지가 있어서 정말 살고 싶을 정도로 멋진 공간이었어요. 수채화로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더라고요.
앞으로도 그리고 싶은 곳들이 많아요. 시목해변에서 누워서 파도소리 들으면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던 시간들, 산책하며 걸었던 시목리 해송숲길, 비금도 명사십리 해변 같은 곳들도 그려보려고 해요."
- 인생과 삶과 관련해서 추천해주고 싶으신 책이 있으실까요. 최근에 읽고 계신 책도 좋고요.
"최근에 <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르치는 역사가 절반의 역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저자인 정진호 한동대 교수의 메시지입니다.
저도 이 책을 통해서 서북지역 교회사, 3.1운동,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전반에 대해서 새로 배우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끊임없이 반목하는 가운데 대통합을 주도한 이동휘나 김립 등을 새로 읽게 됐습니다. 더불어서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꿈과 함께 다음 세대가 펼쳐나갈 동북아시아 평화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품게 해 준 책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시목해변>
무성했던 나뭇잎도 다 떨구고
주렁주렁 열매도 다 내어주고
마른가지에 까치밥 몇 알 걸린 감나무처럼
빈허리춤에 달랑 구름 몇 점 품고
바다 옆자락에 누운 시목해변에는
어릴적 대청마루에서 낮잠 자다가 잃어버린
유년의 꿈이 뒹굴고 있었다.
도둑게들은 한낮에도 기어나와
그리움이 찰랑이는 백사장 위에
비밀의 지도로 그린다.
파도에 떠밀려온 그리움을 주우며
소년과 소녀로 되돌아갔다가도
자고나면 다시 어른이 되어
주섬주섬 무거운 짐가방을 챙기는 어른아이들에게
동화의 섬 도초도 시목해변은 속삭인다.
"좀 쉬어가도 괜찮아"
"좀 뒤처져도 괜찮아"
"좀 천천히 가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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