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접촉과 접속, 인간의 소통 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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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위기는 우리 삶에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쳤지만 특히 만남 혹은 소통의 측면에서 그렇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은 '소통하는 인간(homo communicans)'이라 할 수 있다.
소통하는 인간을 '교류하는 인간'이라고도 표현한다.
어쩌면 소통과 교류는 인간 본성과 인간 역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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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위기는 우리 삶에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쳤지만 특히 만남 혹은 소통의 측면에서 그렇다. 대면과 비대면이란 용어와 관련 조치들이 우리 일상을 규정짓는다. 이런 상황은 우리 삶에 있어 대면과 비대면의 의미와 그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갑자기 대면의 소중함을 느끼거나 대면 없는 삶의 가능성에 익숙해진다. 또한 비대면의 일상성을 절감하거나 비대면만의 삶의 가능성에 당혹해한다. 다시 말해 대면 사회에서 비대면을 추구했다면, 이제 비대면 사회에서 대면을 목말라한다.
코로나 위기에 대한 처방을 요약하면 대면과 비대면의 중요성과 현실성을 모두 인정한다. 문제는 양자 간 선택이 아니라 균형이다. 대면과 비대면이 함께 이뤄지는 삶을 접촉(대면)과 접속(비대면)이란 단어로 묘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접촉과 접속은 방식은 다르지만 지향하는 바는 같다. 바로 소통이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은 ‘소통하는 인간(homo communicans)’이라 할 수 있다. 소통하는 인간을 ‘교류하는 인간’이라고도 표현한다. 어쩌면 소통과 교류는 인간 본성과 인간 역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소통이 중요한 만큼 문제도 많고, 그래서 바람직한 소통에 대한 갈구도 커진다. 이에 대한 기독교적 함의를 간추리면 첫째, 소통과 계시다. 소통은 아는 것만큼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쌍방적 교류가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알려주는 소통의 최고는 계시다. 신인관계에서 양자 간 간격이 크기에 신이 주도적으로 소통하지 않으면 소통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계시인데 인간관계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일방적 앎은 탐구, 탐색, 탐험, 탐정은 될 수 있지만 소통은 안 된다. 즉 일방적 앎도 중요하지만 쌍방적 교류와는 다르다. 성경은 가장 깊은 관계를 ‘안다’라고 표현한다. 아는 것은 쌍방적 교류에서 신뢰, 안정, 기쁨이 되지만 일방적 교류에선 불신, 불안, 불만이 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를 안다는 것처럼 큰 위협도 없다. 일방적 앎을 흔히 정보라고 부른다. 국가 경영에 필요하더라도 민간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지식 수집 기관을 대개 정보부라고 지칭한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둘째, 소통과 진실이다. 소통은 진실의 교류여야 한다. 거짓을 목표로 한 소통은 없다. 그러나 현실상 소통에는 거짓이 많다. 그 이유와 양상은 다양하다. 작게는 어리석은 사람을 노리는 사기꾼의 거짓말부터, 크게는 언론의 가짜뉴스 양산과 정치의 여론조작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거짓은 거짓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짓은 비진실을 넘어 반진실이 된다. 즉 거짓은 진실의 왜곡이고 파괴다. 사람들이 흔히 거짓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거짓은 십계명에 속하는 엄연한 범죄다. 예수께서도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라고 경고했다. 거짓의 소통은 마실수록 목마른 바닷물과 같다.
셋째, 소통과 변화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모든 것이 변하듯이 소통의 양상도 변한다. 요즘 젊은 층은 카페에 마주 앉아서도 대화보다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중장년층에겐 낯선 풍경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일상이고 가장 편한 방식이다. 소통 방식으로 인해 소통을 저버려서는 안 되겠다. 최근 일부 유튜버가 고액소득자로 부상할 만큼 새로운 소통이 중요하다. 소통의 시작은 소통 방식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시작된다. 원래 기독교는 소통의 종교였고, 특히 개신교는 인쇄술이란 새로운 소통 수단을 적극 수용한 문화적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였다. 소통이 중요한 요즘, 기독교가 그 본질을 회복하고 앞장설 수는 없을는지.
안교성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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