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38년생 김만옥씨의 꿈

2022. 1. 7.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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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낯선 번호가 찍힌 전화를 받은 건 작년 연말이었다. 바쁜 업무 중에 받아서 사무적인 응답을 할 요량이었는데, 첫마디에 그만 시간이 정지된 듯 몸동작이 차분해졌다. 자신을 ‘38년생 소설가 김만옥’이라고 밝힌 상대방은 최근 신문 기사에 인용된 나의 말이 인상적이어서 전화번호를 알아냈다고 했다.

용건은 간단했다. 소설책을 내고 싶어했다. 출판사에 투고하는 방법도 익숙하지 않고 컴퓨터로 작업하지 않아 읽기 쉽지 않은 손글씨 원고를 봐주고 출간을 논의할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내 이름이 눈에 띈 것이다. 38년생 소설가의 꿈은 사뭇 정겹고 다정한 어투에 실렸다. 출판인으로서 투고하겠다는 문학인의 의지를 존중하는 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에 손글씨 원고와 오래전 출간했던 작품집 세 권이 동봉된 우편물이 도착했다. 1938년 경남 의령 출생, 1957년 마산여고 졸업, 1963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졸업, 197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순례기’ 당선, ‘내 사촌 별정우체국장’ 등 소설집 출간. 명기된 간단한 약력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훑었을 뿐인데 한국 현대사 속의 여성 작가 삶이 그려졌다.

소설 원고의 첫 단락은 이랬다. “젊어 혈기가 있을 때는 어떤 사건을 듣거나 보면 악착같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부터 따졌다. 심지어 내 편인지 저쪽 편인지 갈라놓고 사건을 생각하는 습성이 있었다. 늙어보니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과 맞닥뜨려도 열을 올리거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 그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해보는 걸로 끝난다. 그런데 주말 신문 첫 페이지에 실린 그 여성의 사진을 보고는 그렇지 않았다.” 꽤 흥미로운 전개가 이어졌다. 신문에 실린 여성과 몇 년 전 얽힌 자동차 추돌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일상 속에서 법조인이 제 권력을 휘두른 초상을 남겼다. 여든다섯 살 작가의 풍자 감각은 녹슬지 않았다. 젊은 작가의 작품을 꾸준히 읽는다는 앞선 통화의 내용이 환기됐다.

원고의 어떤 부분이 흥미롭다고 책 출간을 결정할 수는 없다. 소설가에게 전화해 출판이 난감한 상황을 이해시키려고 했다. 설명을 들은 소설가는 이해했다면서 책을 내고 싶은 계기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뇌경색으로 쓰러져 4개월 동안 치료받고 퇴원한 뒤, 언제 떠나도 놀라지 않을 나이를 체감했다고 한다. 제대로 책을 내고 싶은 소망은 그래서 강렬해졌다.

나는 38년생 소설가의 책 출간 꿈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새해 칼럼에 써도 되냐고 허락을 구했다. 흔쾌히 허락한 소설가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자신의 진짜 꿈을 알려주고 싶다는 것이다. 소설집을 내는 것도 꿈이지만 ‘남편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진짜 소망이라고 말한다. 남편분이 홀로 남는 것을 걱정하느냐고 반문했는데, 뜻밖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것보다 정말 혼자 살아보고 싶어서 그렇다. 평생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엄마로 살았다. 특히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좋아해서 100세 넘게 사실 때까지 눈앞에 내가 없으면 힘들어했다. 일흔넷까지 모셨으니 소설 쓰는 삶하고 거리가 있었다. 명색이 소설가인데 나만의 시간을 제대로 가져보지 못해서 홀로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싶다’는 말이 웃음소리에 섞였다. 깜짝 놀랐다. 38년생의 꿈에 대한 편견이 무너졌다. 나만의 시간, 나만의 방을 원하는 작가의 꿈은 늙는 법이 없구나.

보부아르는 “노년이 이전 삶에 대한 터무니없는 패러디가 아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저서 ‘노년’에서 말한다. 세월에 순응하며 남은 날들을 조용히 지내는 노년의 미덕을 우리는 찬양하지 않았던가. 세상 어딘가에 호기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꿈을 꾸는 노년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새해다. 나이 한 살 더 먹은 나의 꿈도 다양하다. 좀처럼 꿈의 목록이 줄지 않는다. 몽상가여서가 아니다. 꿈을 잃지 않으면 미래를 오늘의 자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오늘 속의 미래는 살아갈 힘을 준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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