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정치인의 말은 아첨인가

고정애 2022. 1. 7.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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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능력 중요하지만 진실해야
말 너머 국가관·정치관도 중요
가슴·감정·머리로도 판단해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새해 첫 주식시장 거래일인 3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본관 앞에서 열린 '2022 증시대동제'에서 증시 활황을 기원하며 황소에 꽃목걸이를 걸고 있다. 왼쪽부터 손병두 한국거래소 이사장, 이종환 서울경제신문 대표이사 부회장, 윤 후보, 윤재옥 국회 정무위원장, 고승범 금융위원장, 이 후보, 나재철 금융투자협회장. [국회사진기자단]

오래전 일화입니다. 2300여 년 전이니 제법 됐지요.
“어떤 나라의 민회에 가서 연설가와 의사를 놓고 누가 그 나라의 의사로 선발돼야 하는지 말로 경쟁한다면 의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말 잘하는 사람이 선발될 겁니다. 그게 그의 바람이면 말이오. 사실 경쟁자의 직업이 무엇이든 연설가는 자기를 선발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하고 경쟁자는 탈락하겠지요.”

당대의 수사학(修辭學) 선생이 말했습니다. 정치가라면 말 잘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면서요.

철학자가 “수사학은 한마디로 아첨”이라고 맞섭니다. “조국이 불의를 행할 때 그 불의를 변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수사학은 우리에게 아무 쓸모가 없다”고도 말합니다.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입니다. 일화를 전한 이는 플라톤이고요. 둘은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 페리클레스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가증스러운 선동정치가’라고 하지요. “시민에게 돈을 주고 게으른 겁쟁이로 만들며 시민들이 수다와 돈을 사랑하게 부추긴 인물”이라고 합니다.

현실에선 그러나 둘이 소수입니다. 수사학은 정치인의 기본 자질이 됐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즉흥 연설 능력이 있었음에도 부인에게 할 말도 먼저 공책에 써놓은 다음 큰 소리로 읽었답니다. 평범한 수준의 지성과 단순한 인격의 소유자인 로널드 레이건은 타고난 달변으로 위대한 소통가로 불렸습니다. 말을 동원해 전쟁터로 보낸 윈스턴 처칠도 있습니다.

정치인에게 말은 그러나 자칫 과대평가되기도 하는 자질입니다. 한 젊은 정치인의 연설이 인상적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탄핵은 정당했습니다. 저의 이런 생각을 대구·경북이 품어주실 수 있다면 우리 사이에는 다시는 배신과 복수라는 무서운 단어가 통용되지 않을 것이며,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지휘했으나 문재인 정부의 부패와 당당히 맞섰던 검사는 위축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름답고도 성숙한 연설이었고, 이게 그를 제1 야당의 최연소 당 대표란 자리로 밀어 올렸습니다. 불과 몇 달 만에 정치적으로 아름답지도, 성숙하지도 않은 본모습이 드러났습니다. 하기야 지금의 대통령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취임사를 했지만, 기회는 평등하지도 과정이 공정하지도 결과가 정의롭지도 않은 세상을 열었습니다.

말이 정치인을 그대로 투영하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선거 때엔 말입니다. 표를 위해 평소 생각을 접어둡니다. 진정 반대하는 것도 찬성한다고 말하고, 옳다고 믿는 것도 나쁘다고 말합니다.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고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려 합니다. 상대방은 사악하며 결국 나라를 망칠 존재라고 믿고 또 그렇게 주장해야 합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때때로 고개를 숙이기도 합니다. 이런 자신이 혼란스럽겠지만 이마저도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저 연기할 뿐입니다.

정치의 요체가 말만인 건 아니란 걸 이해해야 합니다. 언어의 조련사란 말을 들었던 JP(김종필)는 현명한 정치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해선 안 될 일은 깨끗이 단념하고 그런 뒤 일의 완급과 선후 또는 우선순위를 가려서 순리에 맞게 다스려 가는 기술이라고 말입니다. 완급·선후·우선순위·순리 다 쉽지 않은 균형감입니다. JP는 또 “국가가 무엇이냐” “정치를 왜 하느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는 국가관·정치관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라와 역사가 요구하는 진정한 지도자라면 욕먹는 일을 두려워해선 안 되며, 필요하면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이런 정치인을 알아보기 위해선(혹은 늘려가기 위해선) 우린 감각·감정만 아닌 이성도 써야 합니다.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려는 말(아첨)을 걷어내고 진실을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물어야 합니다. “누가 가장 정직한 사람일까. 누가 가장 용감할까.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누가 가장 신중하게 생각할까.”(『대통령의 조건』)

고정애 논설위원

고정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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