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호의 시선] 증세는 불가피, 더 이상 피하지 말라

서경호 2022. 1. 7. 00:4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연말 미국 워싱턴 국제통화기금(IMF)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이창용 국장. 오미크론 변이의 확산으로 새해 들어 IMF 직원들도 대부분 다시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이 국장은 요즘 포퓰리즘 관련 책들을 찾아 읽고 있다고 했다. [사진 이광조]

돈 쓰는 공약만 하는 ‘비겁한 정치’


“10년간 GDP 0.5%씩 매년 증세를”


이창용 IMF국장 제언 참고할 만

2020년 5월, 이창용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장과 인터뷰했다. ‘한국, 현금 살포 의존 말라, IMF서 날아온 경고’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는데 전 국민 대상으로 나눠주는 재난지원금과 급증하는 국가부채에 대한 우려를 담았다.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인터뷰를 본 어느 해외 블로거는 기사의 정치색 운운하며 기레기 딱지를 붙였다. 선진국은 한국보다 국가부채비율이 훨씬 높아도 괜찮은데 뭔 소리냐는 거였다.

언제부터 재정건전성을 보는 시각이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무슨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돼버렸다. 재정을 써야 할 곳에 제대로 쓰고 허투루 낭비하지 말자는 말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합리적으로 토론하면 될 일을 제 입맛에 맞는 딱지부터 붙이고 드잡이하듯 달려든다. 안타깝다.

어제 중앙일보에 게재된 이 국장 인터뷰는 이런 거친 공격에 대한 친절한 맞춤 설명이다. 이 국장에 따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이 100%를 넘어서는 시기가 국회예산정책처의 2020년 전망보다 더 빨리 올 수 있다. 국회예산처는 복지를 현 수준으로 유지해도 2020년 말 45%인 국가부채비율이 2030년 75%, 2040년 104%로 급증할 것으로 봤다. 여기에 코로나처럼 큰 위기가 올 때 자영업자 손실보상금처럼 불가피하게 써야 하는 재량적 지출증가를 고려하면 2040년 이전에 100%를 넘어설 수 있다는 거다.

그게 왜 위험한가. 국가부채가 급증하면 발행이자율이 올라 이자 부담이 커진다. 국채를 사는 데 돈이 많이 들어가니 주식과 회사채는 덜 팔리고 결국 시장금리가 올라 민간 투자가 위축된다. 이른바 구축효과다. 선진국조차 기축통화 달러를 가진 미국 빼고는 국가 부채 급증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했고 이탈리아는 국가부도 위험에 시달렸다.

사실 어느 정도가 안전한 국가부채비율인지 정답은 없다.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재정 적자를 잘 관리하고 경제정책을 제대로 운용하는지에 따라 시장의 신뢰가 달라진다. 부채비율이 늘어나도 한국을 미국·일본처럼 괜찮다고 볼지, 터키·멕시코처럼 불안하게 볼지는 우리가 아니라 국제금융시장에 달려있다는 이 국장의 언급은 귀 기울일 만했다. 점잖게 표현했지만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이면서 기축통화국이 아닌 후자로 분류될 가능성이 크다는 걱정으로 이해했다.

진보는 재정건전성이란 단어가 이미 보수의 프레임 안에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류덕현 중앙대 교수는 국가부채를 중장기적으로 통제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며 ‘지속가능한 재정’을 말한다. 국가부채비율보다 국가부채의 성격이나 만기구조를 봐야 한다고도 했다. 일반회계 적자를 메우기 위한 적자성 채무인 진성 국가부채만 따져보면 부채비율이 30%대로 떨어지고, 잔존만기 1년 이하의 단기채무도 한참 낮은 수준이니 아직은 괜찮다는 의견이다. 재정건전성을 지키는 것보다 국민경제를 살리고 국민 삶의 안정을 지키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책의 시간』)

요컨대 필요할 때 잘 쓰기 위해 재정건전성도 있다는 얘기겠다. 재정건전성이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라는 건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코로나 위기에 재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것도 그간 재정을 건전하게 관리한 덕분 아니겠나. 차기 정부는 모르겠지만 차차기 정부도 지금 정부처럼 재정을 맘껏 쓸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고령화와 노인층 빈곤을 고려할 때 앞으로 복지지출은 더 늘어나야 한다. 진보는 물론이고, 보수 안에서도 공감대가 많다. 복지에 쓸 돈을 마련하는 방법은 둘 뿐이다. 국채를 더 발행하든지, 세금을 더 걷든지. 국가채무비율이 너무 높아지는 건 부담스럽다. 코로나 같은 일시적인 충격이라면 모르지만 복지 지출처럼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비용은 빚이 아니라 증세로 조달하는 게 재정의 기본원칙이다.

이창용 국장은 사회보장기여금을 포함해 앞으로 10년간 세수를 매년 GDP 대비 0.5%씩 늘리자고 제안했다. 증세로 인한 정치적 부담을 특정 정부에만 지게 하지 말고 더 넓게 분산시키자는 거다. 연금개혁도 여론 눈치를 보는 대선 후보들이 증세에 얼마나 적극적일지는 의문이다. 물론 증세가 필요하다고 밝힌 후보는 있지만 구체적인 각론은 아직 잘 모르겠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연초에 ‘사이다 발언’을 했다. 확대재정을 말하면서 증세를 피하는 건 ‘비겁한 정치’라고 일갈했다. “정치가 문제다. 돈은 엄청나게 쓰겠다고 공약은 다 하면서 세금은 다 깎아준다고, 한쪽에서는 기름을, (다른) 한쪽에서는 소화기를 뿌리며 정치하고 있다.”

서경호 논설위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