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입덕부정기
입덕. ‘들 입(入)’자와 일본어 ‘오타쿠(御宅·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를 한국식 발음으로 바꾼 ‘오덕후’의 ‘덕’자를 합쳐 만든 말이다. 어떤 인물이나 분야에 푹 빠져 매니어가 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파생어로 자신이 몰두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을 뜻하는 ‘성덕’, 흥미를 잃어 좋아하는 일을 그만두는 ‘탈덕’이 있다.
누군가는 입덕에 앞서 입덕부정기를 거친다. 자신이 무언가에 빠졌음을 인정하지 않는 시기다. 머리로는 ‘내가 왜 ~같은 걸 좋아해’라고 부정한다. 그러나 사실은 몸과 마음이 이미 입덕에 가까워져 있다. 입덕부정기의 종착점은 입덕이어야만 한다.
최근 종영한 MBC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에 입덕을 하게 됐다. 같은 방송국에서 2007년 방송한 대하드라마 ‘이산’과 달리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와 후궁인 궁녀 출신 의빈 성씨의 러브스토리에 집중한 드라마다. 우연히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으로 처음 드라마를 접했다. 웹소설이 원작이라니 별 기대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1회부터 드라마 정주행을 하고 있었다. 남자 주인공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하고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신분의 차이 때문이었을까. 두 사람도 15년에 걸친 지독한 입덕부정기를 거친다. 의빈 성씨가 정조의 세손 시절을 포함해 두 번이나 승은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궁녀들을 가까이한 것이 할아버지인 영조의 눈 밖에 나는 계기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의빈 성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것이 아닐까.
입덕을 해보니 ‘덕질’이 주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하나는 취향이 생겼다는 점이다. 취향이 취향을 파도 타서 열성적으로 한 분야를 파고드는 행위는 삶에 활기를 부여해준다. 다른 하나는 그 취향을 공유하는 데서 온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관련 영상을 클릭한다. 그리고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남긴 댓글을 확인한 뒤 ‘좋아요’를 누를 때다.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중앙일보 신년 여론조사에서 여야 대선후보 모두 이미지가 나빠졌다는 응답이 좋아졌다는 응답보다 높았다고 한다. 2030세대에선 두 달 전보다 오히려 부동층이 늘어났다. 국민의 입덕부정기가 길어지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정점인 대선이 국민의 ‘부정’으로 끝나서는 안 될 일이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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