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이 나당전쟁을 기억하는 방식
[고구려사 명장면-140]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얻은 값진 승리는 공동체 구성원에게 커다란 자부심으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다만 그 전쟁과 승리를 기억하는 방식은 때에 따라, 공동체에 따라 다를 것이다. 고구려가 수양제와 당태종의 침공을 물리쳤을 때도 그 승리에 대한 고구려인 나름의 기억 방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되면서 고구려 독자적 역사 기록이 소멸되고 승전의 기억조차 전해지지 못했다. 그래서 고구려와 수·당 간 전쟁은 전적으로 중국 측 기록에 의존해 구성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많았다.
다행스럽게 나당전쟁의 경우는 달랐다. 신라는 당과의 전쟁에서 스스로 승리를 거뒀다고 자부했고, 그 자부심을 역사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의 기사로 전해지고 있는데 중국 측 기록과는 달리 신라인의 시각에서 나당전쟁을 바라보는 내용이 적지 않다.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이 두 전투는 전회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스스로 승리했던 전투라고 기록한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데 '신라본기'에는 675년 9월 매초성 전투와 676년 11월 기벌포 전투가 벌어진 그 사이에 여러 전투를 함께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앞의 두 전투에 가려져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데, 오히려 나당전쟁에 대한 신라인의 기억을 되새겨보는 데는 더 적절한 기사라고 하겠다. 아래에 신라본기 기사 그대로 제시한다.
① 말갈이 아달성(阿達城)에 침입하여 노략질하자 성주 소나(素那)가 맞아 싸우다 죽었다.
② 당나라 군사가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전사하였다.
③ 말갈이 또 적목성(赤木城)을 에워싸고 전멸시켰다. 현령(縣令) 탈기(脫起)가 백성을 거느리고 대항하여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모두 죽었다.
④ 당나라 군사가 다시 석현성(石峴城)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는데,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⑤ (676년) 가을 7월, 당 군사가 와서 도림성(道臨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는데, 현령 거시지(居尸知)가 죽었다.
위 전투 기사 ①~④는 신라본기에서 매초성 전투 기사 뒤에 이어서 기록돼 있는데, 그렇다고 이 전투 전부가 매초성 전투보다 늦게 벌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①의 아달성 전투는 삼국사기 열전 소나전에 풍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여기서는 675년 봄에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②의 칠중성 전투는 2월에 당 유인궤가 칠중성을 공격한 전투와 동일한 전투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물론 그 뒤에 다시 칠중성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매초성 전투 이후는 아닐 것이다. 어쨌든 위 전투 기사들은 675년 중 어느 달에 벌어졌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매초성 전투 기사 뒤에 몰아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위 기사에 보이는 전투 지역 역시 주목할 만하다. 아달성은 강원도 철원, 적목성은 강원도 회양, 칠중성은 경기도 파주, 도림성은 강원도 통천에 비정되며. 석현성은 불분명한데 대략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전투 지역은 곧 신라군과 당군의 주요 접전지로서, 당시 신라의 북쪽 전선이 어디쯤이었는지를 대략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위 다섯 전투 기사에서 공통점이 하나 보인다. 바로 신라 측 전투 지휘관인 성주와 현령이 모두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점이다. ③~⑤의 경우에는 성도 지켜내지 못하고 당과 말갈 등 적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모두 패전한 전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의 경우 신라의 승리를 다소 과장해 기술한 면이 있음을 지적했는데, 패전이나 다름없는 이들 전투를 일일이 기록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신라본기에는 ④ 기사 뒤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이어진다.
"우리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열여덟 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이겨서 6047명을 목 베고 말 200필을 얻었다."
위 기사는 마치 675년에 벌어진 당군과의 전투를 마무리하는 듯한 기록인데, 매초성 전투 외에도 18번이나 되는 크고 작은 승리를 얻었음을 자부하고 있다. 그중에는 그 승리를 자랑할 만한 전투가 몇 건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둔 18번의 전투가 아니라 패전에 가까운 앞의 ①~④ 기사를 더 당당하게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신라인에게 위 기사의 전투는 결코 패배가 아니었음을 뜻한다. 비록 성은 함락되고 성주와 현령 및 많은 군사가 전사했지만 바로 그 죽음을, 이들 전투와 순국한 인물들을 결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숭고한 기억으로 남기고자 한 것이다.
다행스럽게 삼국사기 소나 열전에는 기사① 아달성에서 소나의 죽음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기록을 전하고 있다. 소나는 백성군(白城郡) 사산(蛇山·현재 충남 천안시 직산면) 출신인데, 아버지 심나(沈那)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무공을 세워 적으로부터 "신라의 나는 장수"라고 불렸던 인물이었다. 675년에 소나는 아달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말갈군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했다. 이때 소나의 행동에 대해 열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소나가 칼을 휘두르며 적을 향하여 크게 외쳤다.
"너희들은 신라에 심나의 아들 소나가 있다는 것을 아느냐? 진실로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고자 도모하지 않을 것이니 싸우고자 하는 사람은 어찌 나오지 않겠는가!"
분노하여 적에 돌진하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단지 화살을 쏠 뿐이었다. 소나도 또한 화살을 쏘니 화살이 벌떼처럼 나는 듯했다. 아침때부터 저녁때까지 싸우니 마치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
소나의 아내는 가림군(嘉林郡·현재 충남 부여)의 양가집 딸이다. (중략) 가림군 사람들이 소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하니 그 아내가 곡하면서 대답하였다.
"남편이 평소 말하기를 '장부는 진실로 마땅히 싸우다 죽어야지 어찌 병상에 누워서 집사람의 보살핌 속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제 뜻대로 죽은 것이다."
대왕(문무왕)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나라의 일에 용감하였으니 대대로 충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그에게 잡찬을 추증하였다. (삼국사기 권47, 소나열전)
소나와 그의 아내, 그리고 문무왕까지 모두 전장에서의 죽음에 대해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적과 맞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고 또 전장에서의 죽음이 자랑스럽다는 생각이다. 이런 죽음을 오늘날 순국(殉國)이라고 표현하는데, 소나의 경우 등이 꼭 국가 의식의 발현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한 몸을 기꺼이 희생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소나의 행위에 문무왕은 지방 출신에게 중앙 관등을 부여함으로써 보상하고 있다. 이는 이후 소나 가문의 사회적 위상이 달라졌음을 뜻한다.
물론 소나가 그런 보상을 바라고 죽음을 맞았는지는 알 수 없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대가를 바라는 것을 단지 통속적인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한 희생과 죽음에 공동체가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는 것이 오히려 건강하고 지속적인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이런 죽음에 대해 단지 말만 번지르르한 칭찬으로 때운다면 과연 그 뒤 누가 같은 희생을 기꺼이 치르겠는가. 소나의 예를 보면 유동, 탈기, 선백과 실모, 거시지 등의 죽음도 그에 합당한 존중과 보상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장군 효천(曉川)과 의문(義文) 등이 죽었다. 유신의 아들 원술이 비장(裨將)이었는데 또한 싸워 죽으려고 하므로, 그를 보좌하는 담릉(淡凌)이 말렸다.
"대장부는 죽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죽을 곳을 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니, 만일 죽어서 성공이 없다면 살아서 후에 공을 도모함만 같지 못합니다."
원술이 대답하기를 "남아는 구차하게 살지 않는 것이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의 아버지를 뵙겠는가?"
(원술이)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려고 하니 담릉이 고삐를 잡아당기며 놓아주지 않았다. 그만 죽지 못하고, 상장군(上將軍)을 따라 무이령(蕪荑嶺)으로 나오니 당나라 군대가 뒤를 추격하였다.
거열주(居烈州) 대감(大監) 일길간(一吉干) 아진함(阿珍含)이 상장군에게 말하기를
"공 등은 힘을 다하여 빨리 떠나가라! 내 나이 이미 70이니 얼마나 더 살 수 있으랴? 이때야말로 나의 죽을 날이다."
하며 창을 비껴 들고 적진 가운데로 돌입하여 전사하였는데, 그 아들도 따라 죽었다. 대장군 등은 슬며시 서울로 들어왔다.
위 기사에서도 아진함과 그의 아들은 신라군의 퇴군을 위해 기꺼이 전장터에서 죽음을 택했다. 정작 패전을 책임져야 할 상장군은 살았으니 그래서 '슬며시' 돌아왔다. 모든 신라인이 순국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원술은 기꺼이 죽고자 했지만, 담릉이 이를 말렸다. 그런데 전장에서 죽음을 대하는 원술과 담릉의 입장 차이가 눈길을 끈다.
즉 원술과 담릉은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태도는 같지만, 담릉은 공을 세우는 죽음, 즉 명예와 보상이 뒤따르는 죽음을 강조하고 있다. 아마 최고 지배층인 진골에 속하는 원술과 달리 중간 계층쯤 되는 담릉의 경우에는 죽음 못지않게 그에 따르는 이름값이나 사회적 보상이 중요했던 것이 아닐까?
원술은 살아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아버지 김유신에게 배척되고 어머니에게 외면받았다. 그런 수치스러움을 씻고자 참가한 675년 매소천성(買蘇川城)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겨 끝내 벼슬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술의 경우가 그 시기에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겠지만, 어떤 동기에서든지 전쟁에서 자기 희생과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가 가장 큰 존중을 받는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전쟁터는 삶과 죽음이 한순간에 교차되는 긴박한 현장이다. 생사의 갈림길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자기 희생을 지고한 가치로 여기는 순수한 순국 의식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을 게다. 그런 죽음에 대해 사회적 명예가 주어지거나 사회·경제적인 보상이 뒤따를 때 더욱 장려될 수 있다. 신라 정부는 통일전쟁기에 사회 전 계층의 전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이에 대한 보상을 그 어느 때보다 확대했다. 지방민에게도 중앙 관등을 부여했고, 관등의 승진과 경제적 보상도 그 어느 때보다 후했다.
소나 열전이 포함돼 있는 삼국사기 열전 7권에는 7세기 전쟁에서 활약한 인물이 대거 나와 있는데, 그 대부분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순국한 인물이다. 나당전쟁과 관련해서는 소나, 원술 정도밖에 기록돼 있지 않지만, 앞서 본 당군과의 전쟁에서 희생한 유동, 탈기, 선백과 실모, 거시지 등도 열전 7권에 들어 있는 인물들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은 요새 같으면 국립묘지에 모시고, 또 기념관을 세워 두고 두고 기억할 만한 인물이다. 삼국사기 열전 7권은 일종의 책으로 만든 기억의 기념관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가 여러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희생을 무릅쓴 인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인물이 많을수록 그 공동체가 더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또 희생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위기에 희생되는 인물도 적지 않다. 그런 희생을 통해 위기를 깨닫고 위기를 넘어설 방도를 찾게 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소중한 죽음이 된다. 이런 죽음을 존중하고 공동체가 보상해줄 때 그 희생이 비로소 값진 희생이 된다. 7세기 신라인은 그걸 알았고 실천했으며, 그런 죽음들이 통일전쟁과 나당전쟁에서 신라 승리의 견인차가 됐다. 그리고 나당전쟁을 기억하는 방식도 바로 그 점에 맞춰졌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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