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화, 단색화지만 단순치 않은 '달 항아리' 같은..

2022. 1. 6.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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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아의 '컬렉터의 마음을 훔친 세기의 작품들']

단색화가 국제 미술계에서 크게 주목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저평가된 미술을 발굴하려는 시장 속성이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출발은 단색화가 철학적으로 심오하고 시각적으로 아름다우며 개념적으로 독특하다는 인식이었다. 단색화의 가장 중요한 국제적 성공 요인은 우선 서양 추상화와 다르다는 데 있다. 즉, 형태와 구성이라는 외형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서양 추상화와는 전혀 다른, 아시아 감성의 새로운 추상화라는 점에서 서양 미술계와 컬렉터들이 단색화에 열광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정상화(1932년생)는 1970~1980년대 한국 미술계를 풍미한 ‘단색화 운동’ 구축에 있어, 박서보, 윤형근 등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무제 73-7’. 격자무늬 방식이 개발되기 전의 찢기 형식을 보여주는 작품.
1957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그는 처음에는 구상 회화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비정형 형태를 추구하는 프랑스의 앵포르멜(Informel) 추상화가 국내에 유입되면서 그런 경향의 추상화를 시도, 추상으로 넘어가게 된다. 자신의 시대를 반영하는 미술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악뛰엘 그룹전’을 비롯한 국내의 다양한 실험 미술 전시에 참여했다. 점차 두각을 나타내면서 이우환, 박서보 등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파리비엔날레(1965년)와 상파울루비엔날레(1967년)에 한국 대표 작가로 참여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67년 서양 미술을 보다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파리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서양 미술의 모방으로는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된다. 1년 후 귀국한 뒤 1969년 일본 고베로 건너가 자신만의 예술 창작을 위한 새로운 도전에 돌입한다. 이 무렵부터 단색화 추상을 모색하기 시작, 다양한 기법과 매체 실험을 통해 격자형 화면 구조를 확립하는 등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새로운 예술적 자극을 찾기 위해 1978년 다시 파리로 건너가 작품에 전념한다. 1992년에 영구 귀국해 1996년 경기도 여주에 작업실을 짓고 지금까지 창작에 몰두해오고 있다.

그의 예술 여정을 보면 한국적 추상 미학의 원형이라 불릴 만한 자신만의 추상화 개발에 성공한 김환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해외에서 살면 더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멀리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며 고독하고 집요한 여정 속에 결국 극히 한국적이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미의 세계를 찾아낸 김환기처럼 정상화도 같은 길을 걸었다. 정상화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 ‘떼어내고 채우기’의 작업 방식은 캔버스의 평평한 표면에 깊이감을 더하면서 수직, 대각선, 수평선으로 이뤄진 수많은 격자무늬를 창조해내는데, 이는 무척이나 힘들고 복잡한 노동 집약적인 과정의 산물이다.

(좌) ‘무제 77-8-12’. 2021년 12월 2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587만5000홍콩달러(약 9억원)에 낙찰돼, 1970년대 작품 가운데 가장 높은 경매가를 기록했다. (우) ‘무제 80-2-B’. 정상화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작업 방식을 심화하는 한편, 다양성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두 가지 색채를 통해 새로움과 융합을 시도한 작품이다.
일례로 1977년작 ‘무제 77-8-12’를 보자. 이 작품은 그의 ‘떼어내고 채우기’ 작업을 잘 보여준다.

우선 고령토 진흙, 물과 아교 혼합물을 캔버스 전체에 고르게 펴 바르는 것이 작업의 첫 번째 단계다. 완전히 마르고 나면 캔버스를 틀에서 조심스럽게 떼어낸 후, 캔버스 뒷면 전체에 가로, 세로, 대각선의 격자무늬를 그려 넣는다. 그러고 나서 그 선들을 따라 캔버스를 꼼꼼하게 접은 후에 전체의 조화를 생각하며 원하는 격자 부분의 고령토를 떼어낸다. 혼합물이 떨어져 나간 부분에 유화 물감으로 겹겹이 채워 넣으며, 덜어냄과 더하기의 완벽한 조화를 찾아낼 때까지 ‘떼어내기’와 ‘채우기’ 행위를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이런 명상적인 반복을 통해 ‘무제 77-8-12’가 잘 보여주듯, 그의 단색 화면은 무한한 시간성과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만의 독특한 이 창작 기법은 고통스러울 만큼 시간이 소요되는 반복 과정을 통해 마음 수련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리는 과정에서 마음을 닦고 수련하는 데 목적을 두는 문인화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내 작품의 목표는 최종 결과물이 아니라 어떻게 이뤄지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데 있다”는 그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단순한 기하학적 회화를 넘어 자신의 캔버스를 무한한 공간으로 확장하는 근본적인 요소들 가운데 하나로 작용한다.

덜어내고 메우는 이런 무한 반복 과정을 통해 그의 회화는 작가의 숨결까지도 섬세하게 담아낸다. 또한 캔버스에 독특한 질감을 창조해내 촉각적 감각을 극대화하면서 표면이 조각처럼 느껴지도록 한다. 조명에 따라 더욱 다양한 효과를 만들어내기에 관객들로 하여금 표면을 만지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유럽 전역에서 미술사학자이자 전시기획자로 활발한 활동을 펼친 로랑 헤기는 정상화의 작품에 대해 “관객이 회화 표면의 시각적 부분에 흥미를 느낄수록 예술 과정의 명상적이고 정서적인 영역을 느끼게 하는, 진정으로 시적인 작품”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는 작업 방식을 심화하는 한편, 다양성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무제 80-2-B’는 1980년대 작품의 전형적인 예다. 하나의 색상을 기조로 하되, 다른 하나의 색채를 가미해, 마치 한 색이 다른 한 색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듯한 섬세하고 미묘한 그러데이션을 통해 새로움과 융합을 찾고 있다. 기법의 완숙미와 미학, 철학 모든 측면에서 아시아의 미감을 보여주는 이 시기 작품이 단연 컬렉터에게 매우 사랑받는 연작 중 하나라 하겠다.

2016년 뉴욕의 유명 갤러리 레비골비에서 개최된 정상화 개인전을 보고, 한 해외 평론가는 “작품을 볼수록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하다”며 “캔버스에 있는 격자무늬는 급작스러운 움직임이나 춤 같은 표현주의적 제스처의 결과물이 아니라 노동이 영혼과 결합해 조용한 콧노래 같은 흥얼거림을 자아내는 듯하다”고 평한 바 있다. 그가 창조한 격자무늬가 서양화의 기하학적 형태나 패턴으로서의 추상화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말이리라.

정상화의 격자무늬는 작고 평평하고 움직임이 없는 형태나 색채가 아니다. 단색으로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생동감이 넘치는 색채의 향연을 펼쳐 보이며, 각각의 작은 네모가 전체를 담은 듯이 풍요롭기 그지없다. 하얀색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단순하지 않은 달 항아리를 꼭 닮아 있다고나 할까.

그가 일궈 낸 형태들 간의 이런 보기 드문 균형과 조화는 명상적 회화와 새로운 형태의 추상을 찾기 위한 지난한 예술 여정의 열매리라.

[정윤아 크리스티 스페셜리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41호 (2022.01.05~2021.01.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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