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의 문화난장] 그 많던 한국 가곡, 다 어디로 갔나

이지영 2022. 1. 6.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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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문화팀장

한국 가곡 부활의 걸음걸음이 쉽진 않았다. “짐 실은 배가 저만큼…”(‘강 건너 봄이 오듯’ 중)이란 가사가 귀에 잘 안 들어왔다. 무대 뒤 스크린에 띄워준 자막을 보고서야 뜻을 깨칠 수 있었다. 이탈리아어로 부르는 ‘돌아오라 소렌토로’ ‘오 솔레 미오’가 더 익숙하게 들렸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도 서양 가곡에서 더 크게 터졌다. 긴 시간 홀대당해온 우리 가곡의 현실이었다.

새해 전야, 지난 12월 31일 밤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선 송년음악회 ‘연애의 정석’이 열렸다. 부제는 ‘로맨틱 가곡 콘서트’. 예술의전당이 2020년부터 펼치고 있는 ‘우리 가곡 활성화 운동’ 차원에서 마련한 음악회다. 이날 프로그램 북에 오른 14곡의 가곡 중 10곡이 한국 가곡이었다. 앙코르곡도 ‘그리운 금강산’이었다.

「 100여년 우리와 동고동락
한국 가곡 부활 운동 주목
“멀어지면 우리만 손해”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까

지난달 3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송년음악회로 열린 가곡 콘서트. 서양식 벨칸토 창법으로 부르는 한국 가곡의 가사 전달을 돕기 위해 자막을 띄웠다. [사진 예술의전당]

한때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가곡이 부흥 운동의 대상이 됐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기자랑이나 뒤풀이 행사에서 ‘비목’ ‘선구자’ ‘보리밭’ 등을 부르는 사람이 흔했고, TV 가곡 프로그램도 따로 있었다.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가곡이 쇠퇴한 이유에 대해 “가창 중심의 학교 음악교육이 감상과 창작 등으로 확장되면서 교과서에서 가곡이 대거 빠졌고, 80년대 이후 대중가요 수준이 높아지며 가곡의 수요가 점점 줄었다”고 짚었다.

한국 가곡이 일상에서 사라져버린 배경에는 성악계의 문제도 있다. 대학의 성악과 커리큘럼이 이탈리아·독일 가곡과 오페라 아리아 등 서구 노래 중심으로 꾸려지면서 한국어에 맞는 발성법 연구가 안 된 것이다. 이탈리아식 가창 기법인 벨칸토 창법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한국어의 가사 전달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31일 공연에서 한국 가곡 ‘첫사랑’ ‘연’ 등을 부른 소프라노 손지수도 “성악가들에게 한국 노래가 제일 어렵다”고 털어놨다. 받침이 많고 발음이 딱딱해 부르기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어 가사의 효용은 발음 문제의 부정적 영향을 상쇄할 만큼 컸다. 손지수는 “관객들이 가사를 이해하는 데서 오는 공감이 느껴졌다”고 했다. 이날 공연을 본 관객 정아름(29)씨도 “한국 가곡 중 생소한 곡이 많았는데도 (가사의) 스토리를 알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한국 가곡의 역사는 홍난파가 ‘봉선화’를 작곡한 1920년을 그 출발로 본다. 그 후 한 세기 동안 가곡은 우리 민족의 삶과 애환을 충실히 담았다.

서울 예술의전당 로비에 마련된 가곡 VR 체험 공간. 무대에 선 기분으로 가곡을 불러볼 수 있다.

이를 테면 조지훈 시, 윤이상 작곡의 가곡 ‘고풍의상’은 한(恨) 대신 멋의 정서를 끄집어내 민족의 자존심을 고취했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 조지훈은 ‘곱아라 고와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화안히 밝도소이다’라며 섬세하고 우아한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언어로 형상화했다. 여기에 해방 이후 1949년 윤이상이 곡을 붙이면서 분명 서양음악 양식이지만 완전히 한국스러운, 독창적인 음악 세계로 구현해냈다.

가곡의 역사에는 우리 근현대사의 부침도 그대로 새겨졌다. 특히 작사·작곡자의 친일과 월북 경력이 불거질 때마다 노래의 운명도 달라졌다.

김소월의 시로 만든 ‘산유화’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1947년 발표한 김순남 작곡의 ‘산유화’는 교과서에도 실리며 국민 애창곡 반열에 올랐지만, 김순남이 월북을 하면서 금지곡이란 딱지가 붙었다. 이후 김성태 작곡의 ‘산유화’(1946)가 그 자리를 대신했고, 1988년 김순남의 ‘산유화’가 해금된 뒤론 두 ‘산유화’가 공존하고 있다. 민경찬 교수는 “이렇게 가곡은 불리는 것도 역사, 안 불리는 것도 역사”라며 “가곡이 잊히는 것은 우리 문화유산의 상실”이라고 말했다.

31일 송년음악회 ‘연애의 정석’을 객석에서 지켜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도 “우리 정서를 담아낸 한국가곡은 우리에게 더 감동적으로 와 닿을 수밖에 없는 예술 형식”이라며 “멀어지면 우리만 손해”라고 잘라 말했다.

‘가곡 부활’의 움직임은 2000년대 들어서 여러 차례 시도됐다. 2004년엔 ‘그리운 금강산’의 최영섭 작곡가 등 원로 문화인들이 중심이 돼 11월 11일을 ‘우리가곡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곡의 재도약은 아직도 여전히 첫발 수준에, 여전히 기지개 단계다. 7일 열리는 신년음악회 레퍼토리를 아예 한국 가곡으로만 짜둔 예술의전당 유인택 사장은 “재미·감동이 있는 가곡 음악회로 대중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곡 ‘눈’ ‘첫사랑’ 등을 작곡한 김효근 이화여대 교수는 “벨칸토 창법의 아름다움을 살리면서 한국어 전달이 잘되도록 하는 것이 성악계의 연구과제”라고 했다. 첫발 이후 기대가 크고 무겁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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