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전망 좋은 집에 대한 단상

2022. 1. 5.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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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조선대 교수·문예창작학과)


아파트 청약 공고문을 읽다 보면 층에 따라 분양가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층이 높을수록 분양가도 올라가는데 이유는 전망 때문이라고 한다. 집안에서 어떤 풍경을 볼 수 있느냐가 경제적 가치로 계산되고 있는 셈이다. 전망 좋은 집이라고 광고하는 전단지가 있는가 하면 조망권을 가지고 이웃과 다투는 일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시청자가 원하는 집을 찾아주는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유난스레 전망을 강조하는 진행자들을 본다. 예컨대 거실 창문을 통해 호수를, 안방 창문을 통해서는 숲을, 또 어떤 창문을 통해선 도심을 볼 수 있다는 식으로 자랑한다. 방송을 보다가 어떤 창문 앞에 서느냐에 따라 그 집은 호수 전망의 집이기도 하고 숲 전망이나 도심 전망의 집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방 창문을 여니 아이들 놀이터가 바로 눈앞에 보인다. 거실 창문으로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골목과 낮은 빌라들을 볼 수 있다. 내 집은 놀이터 전망의 집이라고 할 수도 있고 골목 전망의 집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문이 하나밖에 없는 집이 아니라면, 우리는 누구나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른 몇 개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집에서 산다. 어느 창문으로 보느냐에 따라 집이 달라진다. 우리는 자기가 보고 싶은 풍경을 보여주는 창문 앞에 주로 선다. 그것으로 자기 집과 세상을 판단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다른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그 역시 내 집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닌가. 자부심을 위한 것이든 자기비하로 인한 것이든, 과장을 위해서든 은폐를 위해서든 한 창문만 보는 것은 균형을 잃은 처사다. 다른 창문 앞에도 서서 보아야 하고 그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 역시 전망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그 집과 그 집을 이루고 있는 세상을 바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잘 보는 것은 한 곳을 주의 깊게 보는 일이기는 하지만 한 곳만 뚫어지게 보는 일은 아니다.

이것은 사실 집 주변에 무엇이 있는가보다 거기 사는 사람이 무엇을 보는가의 문제다. 산이나 바다, 구름이나 거리는 그것들을 보는 누군가의 눈길에 의해 비로소 경치가 되기 때문이다. 사물은 눈에 담길 때 경치가 된다. 김광규 시인에 의하면 보는 것이 탄생시키는 것이다. 시인은 길도 없이 가파른 비탈에서 이끼가 두둑이 덮인 돌을 발견하고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거기 있었을지 자문한다. ‘2천 년일까 2만 년일까 2억 년일까… 지금까지 아무도/ 본 적이 없다면 이 돌은/ 지금부터/ 여기에/ 있다/ 내가 처음 본 순간/ 이 돌은 비로소/ 태어난 것이다’(‘어느 돌의 태어남’ 중)

감옥에 갇힌 죄수와 관련된 우화가 있다. 어떤 죄수는 감옥의 창을 통해 쇠창살을 보며 절망하고 어떤 죄수는 같은 창을 통해 파란 하늘을 보며 희망을 품는다는 이야기. 눈앞에 무엇이 있든 마음에 담지 않는 사람에게는 없는 것과 같다. 들을 귀가 없어서 좋은 연주를 귀에 잘 담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그 좋은 음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창문 앞에 서서 무엇을 보는지가 어떤 집에 사는지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사실보다 해석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는 이 말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일어난 일보다 그 일에 대한 의미 부여가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그러나 일어난 일을 파악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면 곤란하다. 모든 텍스트의 해석은 바른 이해에 근거한다. 바른 이해 없이 자기만의 해석만 앞세우거나 심지어 자의적 해석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이들이 있다. 신념이 투철한 사람들에게서 자주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제대로 바르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해석에 우선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텍스트를 이해하려고 하는가. 해석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이해에서 멈춘다면 길을 가다 말고 멈추는 것과 같다. 감옥의 죄수 우화가 알려주는 대로 같은 창문을 통해서도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제대로 보고 잘 해석할 수 있기를! 정초에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다.

이승우 (조선대 교수·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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