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덕근의 한반도평화워치] 국경 사라진 데이터, 디지털 통상정책 '발등의 불'
한국 경제 앞날 걸린 ‘디지털 뉴딜’
인터넷을 상업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따라서 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디지털 통상을 다룰 기반이 거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현재 WTO 86개 회원국이 진행하는 디지털 무역 협상의 성패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속화된 디지털 전환에 직면한 WTO 체제의 장래가 걸린 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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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상거래에선 시장개방 협상, 국내산업 보호 의미 감소
구글·넷플릭스 등 플랫폼 기업에 대한 반독점 규제안 대두
인앱 결제·구글세 논란 등 디지털 통상규범 정립 서둘러야
정부·산업계 손잡고 다자간 협상체제에 적극적인 대응을
」
WTO 출범 직후 정보통신(IT)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자 WTO 회원국들은 소프트웨어·음원·전자책과 같은 전자상거래에 대해 관세를 면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다 닷컴 버블이 붕괴하던 2001년 6월 WTO에서는 디지털 재화를 상품과 서비스 중 어디로 분류할지 등 기초적 안건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2008년에 이어 2015년 케냐 나이로비 각료회의가 실패한 배경에는 국제통상 핵심 현안으로 부상한 디지털 무역 의제를 다루지 못한 탓도 크다. 2020년 12월 전자상거래 규범 초안이 마련됐으나 견해차가 커 앞으로 열릴 12차 WTO 각료회의에서 실질적 진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미국 질서에 맞선 중국의 디지털 무역
2000년대 들어 디지털 경제 전환은 물류·거래 비용을 놀라운 수준으로 감소시켜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했다. IT기술 발전으로 모바일 산업이 육성되고 소셜네트워킹 기반 서비스가 성장하면서 국내총생산(GDP) 같은 기존 경제 개념에 반영되기 어려운 대규모 사회 후생효과가 발생했다. 디지털 무역의 기본 통계조차 확보되지 못한 상황임에도 일부 선진국은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디지털 통상질서를 수립했다. 혁신적 디지털 통상규범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통해 제시된 후, 포괄적·점진적 TPP(CPTPP), 미국·멕시코·캐나다 무역협정(USMCA), 미국·일본 디지털무역협정, DEPA, 호주·싱가포르 디지털경제협정을 거치면서 인공지능과 디지털 표준뿐 아니라 해저 케이블 같은 인프라까지 포함하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미국 주도의 디지털 통상질서에 맞서 중국은 일대일로 네트워크를 활용해 ‘디지털 실크로드’를 구축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2017년 11월 알리바바가 주도해 말레이시아에 수립한 디지털 자유무역지대다. 말레이시아 중소기업들이 거대한 중국 전자상거래 시장에 쉽게 진출하도록 지원한다는 취지로 추진됐다. 2018년 4월에는 태국으로 확대됐다. 수출 인프라가 취약한 수천 개 중소기업이 알리바바 플랫폼을 이용해 사업 기회를 확대했지만, 알리바바의 디지털 사업 방식과 알리페이의 모바일 금융결제시스템 확산에 따른 중국 의존 문제가 대두했다.
매년 20% 수준의 성장을 지속하며 2021년 3000조원 규모에 달한 전자상거래 시장과 2019년 1억7000만 명에 육박한 중국 관광객들의 해외 소비는 세계에 중국식 디지털 무역을 전파하는 원동력이다. 국내 규제가 정비되기도 전에 이미 100여개 국가의 주요 관광지에서 알리페이와 위챗페이가 통용되고 많은 국가가 중국판 우버 디디추싱을 도입했다.
2020년 6월 공식 개통한 베이두 위성항법 시스템과 화웨이마린이 구축하는 해저케이블망은 일대일로 사업과 맞물려 디지털 양극화 문제에 시달리는 개도국들의 디지털 전환 인프라를 제공한다. 구매력과 시장성이 부족해 미국의 첨단 플랫폼 기업들이 경시하는 대다수 개도국 시장에서 중국은 디지털 무역 관행과 표준을 선점하고 있다.
데이터 유출은 국가안보 위협 요소
디지털 전환으로 천문학적인 거래가 데이터화하면서, 데이터 이동 자체가 디지털 무역의 핵심이 됐다. 디지털 전환으로 산업구조가 변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방송·언론 등 시청각 서비스다. 대부분 국가가 방송·언론 서비스의 시장 개방에는 보수적이고 여전히 많은 규제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정보통신기술 확산으로 유튜브·넷플릭스·구글 등이 산업을 장악하면서 디지털 무역 차원의 데이터 이동 제한이 없는 한 대부분 국가에서 시청각 서비스는 거의 무제한 개방에 노출됐다.
21세기 디지털 통상에서는 노동·자본·토지보다 데이터가 더 중요한 생산요소로 대두한다. 그러나 데이터의 역할을 반영한 디지털 통상이론은 고사하고 디지털 무역을 측정하는 방법조차 개발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데이터의 자유로운 이동을 기반으로 디지털 무역 확대를 추진하는 선진국 진영과, 디지털 주권을 앞세우며 만리방화벽(Great Firewall)을 쌓는 중국·개도국들의 정치적·감정적 대치가 갈수록 격화하고 있다.
일정 한도를 넘어선 데이터의 운영·유출은 개인정보 보호 문제뿐 아니라 기업의 사업 건전성 문제, 나아가 국가안보 문제도 초래한다. 이는 대다수 국가에서 금융정보와 의료정보의 국경 이동이 여전히 큰 논란인 이유이기도 하다.
디지털 재화, 상품인가 서비스인가
우리 정부는 2020년 1월 개인정보보호법·정보통신망법·신용정보법 등 데이터 3법을 개정했다. 이는 최근 추진되는 디지털 통상협정에서 데이터 자유 이동 원칙과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 글로벌 통상규범과의 괴리가 커지기 전에 국내 제도가 정비돼야 한다.
최근 국내에서 넷플릭스법(과도한 트래픽 유발 디지털 사업자에게 통신서비스 품질 유지 의무 부과), 인앱 결제(앱 콘텐트 결제 때 앱 운영업체 시스템을 통한 결제), 구글세(해외 사업장을 통해 조세를 회피한 IT기업들에게 부과하는 세금) 등 논란이 이어지면서 디지털 통상규범을 정립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사실 디지털 통상규범이 충분히 갖춰지지 못하면서 기존 통상규범의 한계가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디지털 재화(product)를 상품으로 다룰지, 서비스로 다룰지부터 논란이다. 3D 프린팅으로 관절 대체용 의료기기를 생산하는 경우 상품무역으로 취급하면 국내외 상품을 차별하지 못하는 내국민 대우 원칙이 자동 적용되나, 서비스무역으로 간주하면 컴퓨터 서비스 분야의 내국민 대우 합의 수준에 따라 차별과 제한의 여지가 있다. 이런 이유로 개도국 등 서비스 수입국들은 디지털 통상을 서비스무역에 연동해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 한다.
디지털 통상 시장에서는 로그인하는 순간 물리적 국경이 사라진다. 이는 기업들의 글로벌 경영으로 90년대부터 논란을 야기한 법인세 회피 문제를 심화시키면서 구글세로 알려진 디지털세를 둘러싼 미국·유럽연합(EU) 간 통상 분쟁을 촉발했다. 지난 10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23년부터 고정 사업장이 없는 인터넷 기업들에도 25% 법인세를 부과한다는 원칙에 합의했지만, 국가별로 매출을 획정하는 기준 등 시행 과정에서 풀어야 할 난제들이 쌓여있다.
사이버공간에서는 정부가 시장 개방 협상을 할 여지도, 반덤핑관세 등 무역 구제 조치로 국내 산업을 보호할 여지도 없다. 세계 사이버공간을 대상으로 경쟁 우위를 선점하는 소수 플랫폼 기업만 남게 되므로 반독점 규제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디지털 통상의 주역인 플랫폼 사업은 본질적으로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사업이라 독과점 성향이 매우 높다. 따라서 인앱 결제 등 주요 사업자의 고유한 사업 행태를 어느 수준까지 허용할지는 디지털 통상에 특화된 경쟁 정책에 달려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으로 임명한 ‘빅테크 저격수’ 리나 칸이 어떤 디지털 경쟁 정책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미국, 사이버·디지털정책국 신설
디지털 통상이 확대되면서 통신인프라가 더욱 중요해졌다. 급증하는 수요로 통신 인프라 구축·유지에 막대한 부담을 초래하면서 구글·넷플릭스·네이버·카카오 등 콘텐트 사업자들에게 통신망 이용 권리를 보장하는 망 중립성 적용 논리가 무색해졌다. 하지만 어느 수준으로 비용을 분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국내 산업 배려와 국제적 원칙 합의가 필요한 실정이다.
정부는 지난달 15일 싱가포르와 디지털동반자협정을 타결하고 실질적인 디지털 통상 협상의 첫걸음을 뗐다. 상호호환성과 연계성이 디지털 산업의 생명이라 이를 뒷받침하는 부처 간 정책의 상호연계성이 절실하다. 지난해 10월 말 주요 7개국(G7) 통상장관들이 7대 디지털 상거래원칙을 발표한 직후 미 국무부도 사이버·디지털정책국을 신설하고 디지털 협상에 나설 채비를 마쳤다. 우리 정부도 디지털 뉴딜로 재충전한 산업계와 함께 디지털 통상 역량을 신속히 업데이트해야 한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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