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부자·40대' 공식 없다 ..新명품족 키워드는 '페르소나'
60대인 기업 대표 A씨는 최근 서울 강남의 포르쉐 매장에 들렀다가 딜러로부터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 “사장님, 요즘 포르쉐를 사는 사람이 대부분 20·30대 젊은이들인 거 아세요? 이분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비트코인이나 주식으로 큰돈을 번 경우가 많고 돈이 모이면 바로바로 쓰는 거 같더라고요.”
과거 명품(럭셔리)은 집안 대대로 부를 이어오거나 정기적으로 고소득이 들어오는 부자들이 주된 소비자였다. 하지만 1~2년 사이 구매층이 눈에 띄게 다양해졌다. 더 이상 ‘서울 압구정동에 사는 연소득·자산 얼마, 40대 이상’ 식으로 특정 짓기 어려워졌다.
고객 10명 중 7명은 40세 이하
비단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단적으로 글로벌 컨설팅기업 베인앤컴퍼니에 따르면 세계 개인명품(패션·잡화·보석 등) 시장에서 20대 초반에서 10대를 아우르는 Z세대 비중은 2019년 8%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17%로 두 배 이상 커졌다. 20·30대가 주축인 밀레니얼 세대 비중은 36%에서 46%로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나아가 2025년엔 개인명품을 사는 10명 중 7명은 40세 이하일 것으로 전망했다.
소비자의 외연이 넓어진 건 명품 업계가 반길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래서 도대체 누가 우리의 고객인가’에 대한 고민도 커졌다. 여기서 주목받는 게 ‘페르소나(persona)’다. 페르소나는 원래 그리스 말로 ‘가면’이란 뜻인데 내 안의 또 다른 나, 남에게 인식되는 나 등의 의미를 지닌다. 마케팅 측면에선 기업이 타깃으로 하는 고객의 이미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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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어떤 사람들이 살까
그렇다면 ‘새로운 페르소나들’은 과연 무엇일까. 가방 브랜드로 유명한 프랑스 명품 브랜드의 국내 관계자는 “지난 연말 회의에서 이제는 ‘MZ’ ‘인터넷’ ‘진보적 이미지’ 없이는 명품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MZ는 잘 알려져 있듯 주 고객층으로 떠오른 10~30세대다. 인터넷은 온라인 쇼핑채널과 오프라인 매장 내 증강현실(AR), 메타버스 등 각종 디지털 경험을 두루 일컫는다. 흥미로운 건 진보적 이미지인데, 여기엔 친환경을 필두로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투명하고 공정하며 윤리적으로 사업하는 이미지 등이 포함된다.
실제 최근 글로벌 명품 업계에서 주목하는 ‘고객 페르소나’를 항목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세대로는 ▶도시에 사는 젊은 중국인 ▶미국의 미래세대 ▶10·20대가 주축인 양성평등 세대가 있다. 문화적으론 ▶그동안 ‘비주류’로 인식돼 온 계층 ▶상류층이 아닌 중산층 여성 ▶명품을 재테크 차원에서 접근하는 투자자와 리셀러(reseller·재판매상) ▶미국의 미래세대가 있다.
사회적 측면에선 ▶당차고 개방적인 중국의 젊은 여성 리더들 ▶양성평등 세대 ▶첨단기술에 열광하는 사람들에 주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품 면에서 ▶명품을 수집 대상으로 보는 수집가들 ▶중산층 여성 ▶투자자와 리셀러의 관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분류를 하다 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분명 범주에 따라 구분을 했는데 페르소나들이 겹친다는 점이다. 여러 개의 정체성이 혼합된 ‘멀티 페르소나’가 포착되는 것이다.
김난도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멀티 페르소나를 “가면을 바꿔 쓰듯 매 순간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며 서로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다층적 자아”라고 정의했는데, 이 멀티 페르소나는 명품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다양해졌는지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다.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그게 어때?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1800년대 영국 가정에선 창문 옆 응접실에 자기 집에서 가장 좋은 가구나 장식품을 배치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조차 마을 사람들이 한 데 모이는 일요일 교회에선 가장 좋은 옷과 구두를 신어 ‘선데이 베스트(Sunday Best)’란 말이 유행했다. 허름한 부엌에 있는 나와 화려한 응접실에 있는 나, 작업장에 있는 나와 교회에 있는 나의 페르소나가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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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에도 ‘대중적 가격’ 있다
전미영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 연구위원은 “그동안 명품은 극소수의 ‘찐부자’들이 사용하던 물건이었고 일반 대중은 오히려 실용적인 제품을 선호하곤 했는데 이제 중·고등학생부터 어느 정도 월급을 받는 신입 사원들도 향유하고자 하는 대상이 됐다”며 ‘사치의 민주화’ 시대가 열렸다고 했다. 그는 “과거 잘나가던 명품 브랜드들도 개인 속에 공존하는 다양한 특성, 페르소나들을 정교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브랜드 가치 순위가 떨어지고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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