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이 담아내지 못한 이성계의 전략전술
[김경준 기자]
KBS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이 인기리에 방영 중이다. 5년 만에 부활한 대하사극이란 점에서 방영 전부터 사극 마니아들의 기대를 모은 작품이었다.
이방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기존의 여말선초 사극들과 달리 이성계 가문 구성원들 각자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어 신선한 인상을 주고 있다.
아쉬움 남았던 '위화도 회군'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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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 묘사된 위화도 회군 |
ⓒ KBS |
드라마의 전개가 기존 사극에 비해 다소 빠르게 전개되는 감이 있다고는 하나, 위화도 회군은 역성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개 과정이 너무 간략하게 묘사되었다. 특히 회군 후 요동정벌군과 도성방어군이 벌인 '개경 전투'는 이성계 전략전술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전투였음에도 '돌격 앞으로' 식으로만 묘사되어 못내 아쉬움을 남겼다.
아마 드라마를 보던 이들 중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이들이 꽤 있지 않았을까. 드라마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위화도 회군과 개경 전투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을까 궁금한 이들을 위해 한 권의 책을 추천하고자 한다.
한국사의 대표적인 전투들을 아홉 가지 전략전술(국가전략·보급전·작전권·포위전·속도전·방어전·공성전·기만전·도하전)의 틀에 맞춰 분석한 <전략전술의 한국사>라는 책이다. 이를 읽다 보면 <삼국지>, <초한지> 뺨치는 전략전술의 장(場)이 한반도에서 펼쳐졌음을 알 수 있다.
저자인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이상훈 교수는 '나당전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개경 전투', '봉오동부근전투상보를 통해 본 봉오동 전투' 등 시대를 넘나들며 군사사를 연구해 온 역사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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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전술의 한국사> 표지 |
ⓒ 푸른역사 |
치밀한 계획으로 추진된 회군
1388년 4월 18일, 5만여 명의 요동정벌군이 평양을 출발했다. 5월 7일 위화도에 도착한 이성계는 회군을 결심했다. 당시 이성계는 이른바 '4불가론'을 주장하며 5월 13일과 22일 두 차례에 걸쳐 회군 허가를 요청했다.
사전에 두 차례나 회군을 요청했다는 점에서 기존 사극들에서도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가 처음부터 계획한 쿠데타가 아니라 부득이하게 내린 결단이었던 것처럼 묘사되곤 했다.
그러나 저자는 "사전에 회군을 치밀하게 계획한 정황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성계가 회군 시점으로 삼은 5월 22일에 주목한다.
이성계가 처음 회군 요청을 했던 5월 13일, 양광도(경기·충청) 일대에 왜구들이 침입해오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우왕은 진압을 위해 도성방어군의 주력을 내려보냈다.
그러자 이성계는 1차 회군 허가 요청을 통해 왕경의 상황을 확인하고 도성방어군 주력이 남하하자 22일 재차 회군 요청을 하는 동시에 병력을 급속히 남쪽으로 돌렸다.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행동에 대해 "이성계의 회군 병력이 사전에 이미 회군을 완벽히 준비해두지 않으면 어려운 움직임"이라고 지적한다.
요컨대 사전에 회군을 결심하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이성계가 왜구들을 진압하기 위해 도성방어군의 주력이 남하한 틈을 타 재빠르게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저자는 요동정벌군의 진군과 회군 속도 비교를 통해 "백성들을 배려하며 일부러 천천히 남하했다"(<고려사> 137, 신우 14년 5월 25일)는 기록과 다르게 요동정벌군은 급속도로 남하해 불과 열흘 만에 개경에 당도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면 요동정벌 당시 평양에서 출발한 군대가 위화도까지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20일이었다. 그러나 위화도-개경 구간은 그보다 두 배나 되었음에도 오히려 소요시간은 반이나 줄어든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당시 이성계가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알 수 있다. 만약 남하했던 도성방어군이 복귀한다면 회군은 실패로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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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 이성계 어진 (전주 어진박물관 소장) |
ⓒ 김경준 |
이성계 전략전술의 진가 드러난 '개경 전투'
6월 1일 개경에 도착한 요동정벌군은 3일 부대를 둘로 나누어 도성의 외곽인 나성(羅城) 공략을 시작했다. 이성계의 우군은 동쪽의 숭인문(崇仁門)을, 조민수의 좌군은 서쪽의 선의문(宣義門)을 맡았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이성계는 선봉장으로 지문하사 류만수를 보냈는데, 출발 직전 주변 사람들에게 "만수는 눈이 크고 광채가 없어서 담이 작은 사람이다. 이번에 반드시 패할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예언대로 류만수가 패하여 돌아오자 이성계는 들은 체도 않고 장막 안에 누워 느긋하게 행동했다고 한다. (<고려사> 137, 신우 14년 6월 3일)
"요동원정군의 좌우군은 동시에 개경의 나성을 공격했는데, 서쪽의 좌군은 전력을 다해 선의문 공격에 나서 진입에 성공했지만 동쪽의 우군은 선봉이 패해 달아나버렸다. 이에 병력이 부족한 수비군 입장에서는 동쪽의 이성계군이 공격 태세를 갖추지 않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동쪽 병력을 서쪽 방어로 전환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틈을 타 이성계는 방어가 소홀해진 숭인문을 순조롭게 통과하여 나성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 177쪽
즉 부하 장수의 패전으로 방심한 도성방어군이 서쪽으로 간 틈을 타 이성계가 동쪽을 공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류만수의 패전은 처음부터 이성계의 지시로 이뤄진 위장 전술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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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경 전투 요도 (출처: 이상훈,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개경 전투」, 『국학연구』20, 2012, 265쪽) |
ⓒ 이상훈 |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의 철저한 사전 준비와 과감한 결단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개경전투에서는 기만·견제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만만치 않았던 최영의 수비군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결국 이성계는 회군의 신속성과 전투의 승리를 통해 조선 창업의 제1보를 내딛을 수 있었던 것이다." - 181쪽
개경 전투의 승리는 기존의 사극들에서 묘사된 것처럼 단순 돌격전이 아닌 철저한 기만술 등 이성계 전략전술의 진가가 발휘된 결과였다.
올해는 이성계가 대승 거둔 임인년
2022년 임인년(壬寅年) 새해가 밝았다. 공교롭게도 660년 전인 1362년 임인년은 이성계가 함흥평야 일대에서 원나라의 장수 나하추(納哈出)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해이기도 하다. 이 '함흥대회전'을 통해 이성계는 고려의 명장으로 이름을 드날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꼭 30년 뒤인 1392년 이성계는 마침내 새 왕조의 주인이 된다.
어쩌면 이성계의 대업은 임인년의 대승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성계가 백전백승의 신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신(神)이 내린 장수였기 때문이 아니라 철두철미한 전략전술로 모든 전투에 대비했기 때문이었다.
임인년을 맞아 이성계처럼 우리 역시 각자의 삶의 전장에서 치밀한 전략전술로 큰 승리를 거두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 다만 백전노장 이성계도 말년에는 아들 이방원에 의해 일생의 유일한 패배를 맛보았다. 그러니 자만하지 말고, 방심하지 말자는 교훈도 함께 새겨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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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전략전술의 한국사>, 이상훈 저, 푸른역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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