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에 주6일 일하는 바느질 장인, 침선장 구혜자

김정연 2022. 1. 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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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선장 구혜자 선생이 영조대왕 도포를 복원한 작품을 매만지고 있다. 지난해 첫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달 23일 서울 삼성동의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 침선장(針線匠) 구혜자(80) 선생의 작업실은 잿빛이 끼어들 틈이 없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색깔의 궁중예복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서다. 물론 선생의 작품들이다. 바늘 하나로 옷 짓는 일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침선장의 세계다.
정작 선생의 옷차림은 수수하기 짝이 없다. 손톱만큼도 물들지 않겠다는 걸까. 그래야 예복의 원색들을 제대로 요리할 수 있다는 걸까. 무심한 흰 저고리다. 선생이 말했다. "제 옷장 서랍에는 흰옷밖에 없어요." 덧붙였다. "언제까지 흰 저고리를 입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무슨 뜻일까. 선생은 침선장 보유자로 아무래도 궁중 예복을 많이 복원한다고 했다. 그런데 오방색이나 원색이 많다는 것. 작품을 조금이라도 돋보이게 하려고 흰 저고리, 검은 치마를 자주 입는데, 나이가 더 들면 흰 저고리가 더이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올까 봐 걱정된다는 얘기였다.
선생은 팔순 현역으로 통한다. 1942년생. 새해 들어 만 80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도 금요일 하루 빼고는 일주일 6일을 일한다고 했다. '월화수목금금금' 수준이다.
그런 선생의 신상에 최근 변화가 생겼다. 아니 본인이 자청한 일이다. 지난해 9월 '시간의 옷을 짓다 동행’이라는 이름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바느질 경력 40년 만에 처음 벌인 일이다. 제자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어서 개인전을 했다고 했다. 갈수록 일반의 관심이 줄어드는 데 그렇게라도 해서 저변을 넓혀야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지난달 초순에는 네이버 쇼핑라이브 ‘박경림의 사는 이야기’에 출연해 출산 준비물 세트와 찻잔과 컵받침 만들기 키트를 팔았다. 점잖은 무형문화재의 이미지와 잘 맞지 않는다는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침선으로 만든 출산 준비물을 필요로 하는 젊은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고, 이런 게 있다는 점도 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출산 준비물 세트는 아기옷·이불·싸개 등으로 구성된다. 명주를 빨아서 풀을 약하게 먹인 다음 솔기 없이 바느질을 해야 해, 다른 일 젖혀두고 매달려도 꼬박 한 달이 걸리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공교롭게도 팔순에 새로운 행보가 많았지만 숫자에 불과한 나이에 큰 의미를 둔 건 아니었다"고 했다. 그저 우연이라는 것이다.


"처음 봤을 때 섬찟"한, 하늘색 구름무늬 광해군 옷

'요선철릭'은 허리에 주름으로 선이 표현된 겉옷이다. 구 선생은 "옷이 크기도 하고, 천을 따로 구해 두 번 제작하느라 총 3년이 걸린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김정연 기자

시선을 강탈하는 원색의 옷감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예복으로 태어나는 것일까.
선생은 붉은색 요선철릭을 집어들었다. 허리 부분에 주름을 잡아 선을 표현하는 스타일이 요선, 요선으로 상의와 하의를 하나로 결합한 옷이 철릭이다. 선생은 "옷이 크기도 한 데다, 딱 맞아 떨어지는 옷감이 없어서 처음 명주로 작업했다가 나중에 ‘연화만초문(연꽃과 덩굴 무늬)' 천을 활용해 처음부터 다시 제작하다 보니 꼬박 3년이 걸렸다”고 전했다. 세상에 둘도 없을 옷이다.

구름문양 하늘색 천으로 겉감을 만든 '광해군 중치막'은 겉옷 안에 입는 솜옷이다. 구혜자 선생은 "처음 봤을 때 색이 바랬는데도 푸른 기운이 돌고, 섬찟,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가장 인상깊은 작품으로 꼽았다.사진 한국문화재재단

선생은 광해군 중치막 복원을 가장 기억에 남는 옷으로 꼽았다. 중치막은 겉옷 안쪽에 입는 솜옷을 뜻한다. 광해군 중치막은 불상 안쪽에 넣어 보관됐다가 발견됐다. 그래서 깨끗한 상태였고, 실물을 봤을 때 감동이 더 컸다고 했다. "섬찟했다. (색이 바래)회색에 가까운데 푸른 기운이 도는 게 굉장히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 구름 문양의 천을 별도 제작하고, 겉감‧안감 작업이 많아 바느질 하는 데만 3개월이 걸렸다고 했다.


바느질 40년 만에 첫 개인전, 네이버 쇼핑라이브도


지난해 12월 17일 네이버 쇼핑라이브 '박경림의 사는 이야기'에 구혜자 선생이 출연한 모습. 네이버 캡쳐
선생은 바느질을 시어머니에서 배웠다. 부산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를 나온 그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재주가 없었다. 바느질이나 뭘 만드는 걸 좋아하긴 했다”고 젊은 시절을 회상했다. 1970년 결혼 후 서울에서 살면서 시댁을 오가며 시어머니의 바느질을 도왔다. 선생의 시어머니가 바로 1대 침선장 보유자 고 정정완 선생이다. 시어머니가 1988년 침선장 보유자가 되자 선생은 정식으로 바느질을 배우기 시작했다. 1995년 전승교육사가 됐고, 고 정정완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2007년 구 선생이 보유자가 됐다.

우연히 시작했지만, "하루 한 사람, 열흘 한 사람 다르다"


선생은 “침선은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했다. 옛 복식을 재현하기 위해 관찰부터 제작까지, 옷 하나당 최소 6개월이 걸린다. "정식 입문 이후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바느질을 연습했다”며 반복‧연마를 강조했다. "익숙해지려면 반복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떤 기능이든 하루 연습한 사람과 열흘 한 사람, 1년 한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다"며, "책읽기를 좋아했지만 바느질을 시작한 뒤에는 전문서적만 봤다”고 했다.

주 6일 일하고, 바느질 집대성 하는 80세 장인


구혜자 선생의 2021년 개인전 '시간의 옷을 짓다 동행' 도록에 실린 영조대왕 도포. 구 선생은 도포의 구성과 수치 등을 볼 수 있게 섶을 펼친 사진도 도록에 실었고, 제도와 치수를 기록한 책도 낼 예정이다. 사진 한국문화재재단
선생은 월‧화‧수‧토요일은 한국문화재재단 수업을 나가고, 목요일은 침선장 이수자 교육, 일요일은 개인작업을 한다. 금요일 하루만 쉰다. 최근엔 코로나로 밀린 수업을 보충하다 보니 하루 8시간 수업을 하는 경우도 많다.
"무엇보다 기록이 중요한 것 같다”며 "시대별로 중요 예복을 설명과 함께 치수, 제도법까지 곁들여 작품집을 낼 계획"이라고 했다. 그간 『한복만들기』 세 권을 냈고, 최근 4권째 원고를 탈고했다.

"요즘 한복, 무대의상 등 고민스러워"


지난해 12월 23일 서울 강남구 한국문화재단에서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침선장 구혜자 씨. 권혁재 기자

일상복도 유행 타지 않는 단색 옷을 즐겨 입는다는 구 선생은 "옷은 단정하게 입어야 한다"며 여러 형태로 변형되는 ‘한복’에 대한 우려도 전했다. 그는 “요즘은 너무 난해해서 한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며 "한복을 모티브로 한 무대의상도, 쇼를 위한 의상이지만 복식으로서의 한복으로 알려지는 건 고민스러운 지점"이라고 말했다.

다만 구 선생은 “한편 ‘그렇게라도 한복을 영위할 수 있다면 괜찮지 않나’ 싶고, 이걸 밑거름으로 나중에 한복에 대해 교육할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제자들에게는 우리 옷을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다양한 연구를 해보라고 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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