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영준의 시시각각] 초보적이고 치명적인 정부의 오류

예영준 2021. 12. 14.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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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세 국민 2%만 부과" 계산은
가계와 개인 뒤섞은 범주 오류
국민 갈라치는 거짓 통계 가려내야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강남우체국에서 관계자들이 우편으로 발송할 종합부동산세(종부세) 고지서를 분류하고 있다. [뉴스1]

숫자에는 마력이 있다. 같은 내용이라도 구체적 숫자를 인용하면서 말하는 쪽에 귀와 마음이 기우는 게 인지상정이다. 정보와 통계를 독점하는 권력자들이 숫자를 동원한 거짓말로 국민을 호도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이유다.

종부세 고지서를 받아든 납세자들의 각종 불만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집 두 채로 각각 주택연금 80만원, 월세 90만원을 받아 생활하는 60대 할머니가 “내가 2%에 속합니까”라고 하소연하며 ‘종부세 거지’를 면하는 길은 이혼 도장을 찍고 부부 각자 1주택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는 청와대 청원을 냈다. 평범한 직장인인 필자의 지인은 얼마 전 작고한 부친의 집을 3형제가 공동으로 상속받아 1.33주택자가 되는 바람에 3형제 모두 종부세 폭탄을 맞았다고 하소연했다. 이래저래 과세 의도와는 정반대로 세금 폭탄을 받은 사례들이 넘친다. 그러자 청와대 고위 당국자가 “종부세는 국민 2%에게 부과되는 것이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라”고 준엄하게 훈계했다. 불만을 표한 자는 졸지에 ‘가진 자의 책임’을 망각한 부도덕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부의 계산에는 아주 초보적인, 그러나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종부세 고지서의 숫자(분자)를 총인구(분모)로 나누면 2%가 맞다. 그런데 분모는 갓난아기를 포함, 비(非)경제활동 인구까지 망라한 숫자다. 종부세는 부동산 소유자인 개인(법인 포함)에게 발부되지만, 실질적 부담을 지는 것은 가계(家計)단위다. 이를 감안하지 않은 단순 계산은 초보적인 범주의 오류다. 만일 분모를 그대로 두고 국민의 몇%가 종부세 부담을 떠안는지 따지려면 고지서를 받은 사람 수에 그들이 부양하는 가족 수를 합친 숫자를 분자로 삼아야 유의미한 통계가 된다. 그럴 경우 그 비율은 6%대로 올라갈 것이고 대도시 지역은 두 자릿수를 훌쩍 넘을 것이다. 종부세 폭탄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드물지 않게 보는 이유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가 종부세 부과 비율이 2%라 강변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국민을 속이고 갈라치는 치명적 거짓말이다. 심지어 2%에 속하는 가장(家長)과 98%에 속하는 나머지 가족 구성원까지 가르는 격 아닌가.
미국 언론인 이지 스톤이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정부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숫자의 마력, 즉 통계를 활용하는 것이다. 한국의 역대 정부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부동산이나 고용 통계에 관한 한 문재인 정부만큼 유난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지난 8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집값 상승률이 7.7%인데 한국은 5.4%에 불과하다”고 한 이호승 정책실장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본인이 생각해도 이상했는지 “다만 이를 설명한다고 해도 국민들께서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알고 보니 그가 인용한 한국부동산원의 조사 방법부터가 엉터리였다. 표본 수가 민간ㆍ금융기관 통계보다 훨씬 적었고 그나마도 편향이 있어 시장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발언 뒤 한국부동산원은 조사 표본을 2배로 높여 그때까지의 오류를 자인했다. 그래도 시장 체감 통계와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입맛에 맞는 부동산 통계만을 인용한 발언은 문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토교통부 장관, 여당 정치인들까지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현상 인식에서부터 왜곡됐으니 온전한 대책은 언감생심이었다.

대선이 3개월이 채 남지 않았다. 본격적인 TV토론이 시작되면 후보들 간의 정책 논쟁과 공약 검증이 이어질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통계를 들먹이며 현란한 공약들을 쏟아낼 것이다. 유권자들을 숫자의 늪에 빠뜨려 허우적거리게 하는 장밋빛 공약이 그중 태반일 것이다. 그 속에서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것이 유권자의 능력이고, 그것이 곧 차기 정부의 품격과 힘으로 연결될 것이다.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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