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구 시신에서 발견된 한국인의 흔적.. 대발견 [한소정의 이슈s]
[한소정 기자]
▲ 연구에 사용된 인골이 출토된 곳을 붉게 표시한 지도. 파랑색과 붉은색으로 표시된 고인골 8구는 두개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이들에게서 중국 요하와 황하지역의 청동기 시대인들과 유사한 유전체 지형이 관찰되었으며, 붉은색으로 표시한 두 명에게서는 상당량의 조몬인 혈통도 관찰되었다. |
ⓒ Gelabert et al. |
오래된 뼈에 남은 DNA는 부패되어 부서지고 화학적으로 변형되기 때문에 복원과 분석에 고유의 기술이 필요하다. 때문에 이 분야의 전문가인 울산과학기술원 박종화 교수와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의 론 핀하지(Ron Pinhasi) 교수 연구팀이 참여했다. 고인골(古人骨, 고고학의 유적 등에서 발굴되는 인골의 유잔) 시료와 고고학, 인류학적 해석에는 중앙박물관의 연구자들이 함께 작업했다. ([관련기사] 한국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화석에 새겨진 흔적 http://omn.kr/1u2e5)
한국인의 유전적 기원
가야 시대는 철기 문화가 꽃 핀 시기다. 신석기를 거치며 농경문화가 자리 잡았던 한반도에 중국으로부터 청동기와 철기 문화가 전해진 것은 기원전 4세기 전후이고, 이어 일본 열도로도 전해졌다. 이때, 문화의 전파만 이루어졌는지 사람들의 이동도 있었는지, 사람들이 이동했다면 그 규모는 어느 정도이고 양상은 어땠는지 등은 중요한 연구 주제다. 현대 한국인의 유전적 기원을 이해하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문화 전파와 함께 대규모의 인구 이동이 있었다면 이미 정착해 살고 있던 사람들과 전쟁의 형태로 거주지와 재산 등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했을 가능성과 이들이 서로 섞이며 살아갔을 가능성을 모두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유전체를 근거로 살펴보면 된다.
연구진은 가야 유적 중 지배층의 무덤 2곳에서 무덤의 주인과 순장된 인골들을 각각 5구, 2구씩 시료 채취하고, 신분을 알 수 없는 조개무덤에서 발굴된 인골 1구까지 총 8구의 인골 유전체 서열을 분석했다. 4-5세기 사이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이었다. 이전에 연구된 세계 여러 지역의 인골들과 다양한 국가의 현대인 유전체들도 분석에 이용했다. 이 인골들은 신석기부터 청동기, 철기 등 그 배경이 다양했는데, 가야인의 유전체와 비교해 어느 시기 어느 지역의 인골이 가장 유사한지를 분석하고, 궁극적으로는 한국인의 기원을 유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연구진은 무덤에서 발굴된 가야인의 유전체가 2-3천여 년 전 중국 요하와 황하 지역에 형성되었던 청동기 시대의 인류 집단과 아주 가깝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은 이 지역의 청동기 문화가 한반도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큰 규모의 인구 이주가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 연구진이 분석한 가야인의 얼굴을 유전체를 토대로 복원한 모습 |
ⓒ Gelabert et al. |
호모 사피엔스의 한반도 진출
가야인은 전반적으로 현대 한국인보다 그 유전적 다양성이 더 높았다. 우리는 흔히 한국인을 '단일민족'으로 표현하는데 실제로 지금까지의 유전체 데이터를 보면 고래로 한반도에 거주해온 한국인은 유전적으로도 '동질성(homogeneity)'이 높다. 한국어가 다른 언어들로부터 뚜렷이 구별되는 언어로 분류되는 것처럼 한국인의 유전체도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이 있고, 한국인 내에 유전적 유사성이 크다는 의미다.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의 유전적 다양성이 더 높았고, 이후에 통일의 역사를 거치는 동안 유전적 동질성이 높아진 것으로 연구진은 결과를 해석했다. 흥미롭게도 이 같은 다양성이 신분에 따라 나뉘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연구 대상이 된 두 개의 상류층 무덤에서 무덤의 주인은 신분이 높은 사람들로, 순장된 이들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로 분류할 수 있는데, 조몬인 혈통이 섞인 인골들은 신분과 상관없이 같은 무덤에서 발굴된 지배층과 순장된 사람이었다.
▲ 인터뷰 화면 |
ⓒ 한소정 |
인류, 호모 사피엔스는 20만 년 전쯤 아프리카에서 태동한 뒤에, 대략 7만 년 전 그 일부가 아프리카에서 나와 유럽으로, 아시아로, 아메리카로 퍼져갔다. 아시아 지역으로 방향을 잡은 인류는 수렵채집 생활을 하며 대략 동남아시아 쪽에서 시베리아 쪽으로, 즉, 남에서 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이주해갔다. 박 교수는 이전의 연구들에서 한국인의 유전체는 이 시기 만주 지역으로 먼저 이주해있던 인류 집단과 이후에 남쪽에서 새로 팽창해 올라온 인류 집단이 서로 섞인 형태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이번 연구는 그렇게 형성된 집단이 청동기 문화와 함께 한반도로 대거 이주해왔다는 것과, 이전에 정착해 살고 있던 집단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섞이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한반도로 청동기 문화를 전파한 것으로 알려진 요하와 황하 지역의 집단, 특히 그들의 청동기 시기의 유전체와 가야인들의 유전체가 가장 가깝다는 사실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이 시기 이 집단들은 한반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곳으로 대거 이주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 지역에서 인구가 폭증하는 과정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가 일어났고 이와 함께 문화의 전파가 일어났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인 유전체 연구 전망
박 교수는 가야인들이 유전적으로 다양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부연 설명했다. 가야인들의 혈통이 청동기 문화와 함께 이주해온 집단과 유사하고, 동시에 조몬인과 같은 다른 계열의 혈통을 일부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서로 섞여가는 형태로 정착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인류는 유전적으로 서로 다른 집단들끼리 마주할 때 '전쟁'의 형태로 상대 집단을 '대체'하고 지역을 차지하는 일도 더러 했지만, 서로 융합해 살아가기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번 연구를 바탕으로 박 교수는 이 시기 형성된 "한국인"의 유전체 지형은 이후 고려시기를 전후로 문화 공동체를 형성하고 하나의 국가, 하나의 언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점점 더 동질성을 높여갔을 것으로 가정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현대 한국인의 유전체 지형은 대략 10세기 전에 그 형성을 마치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한편, 이번 연구에 함께 한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장용준 박사는 한국의 토양이 산성을 띠는 만큼 인골이 쉽게 부패하기 때문에 발굴되는 경우가 흔치 않고, 발굴하더라도 DNA가 부패하지 않고 남아있는 경우가 많지 않으며, 인골을 학문적 접근 외에 조상이자 보존할 문화재로 보는 문화적인 분위기도 있다며 한국인의 고인골 유전체 연구의 어려움 및 필요성을 강조했다.
인류 고고학적 질문을 탐구하는 일에 인골의 DNA를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고 최근 실험 기술은 인골에 남기는 손상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온 만큼, 앞으로 이 같은 연구가 더 활발해지길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도 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인의 유전체 지형이 모습을 드러낸 후에도 간헐적으로 다른 혈통과의 혼합이 있었는데, 이 같은 새로운 유전자의 유입은 한국인 유전체의 진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우리 선조들이 다른 문화권과 얼마나 가까운 교류를 했는지, 그렇게 유입된 유전적 자원이 새로운 병원균이나 여러 환경 조건에서 선조들이 살아남는 데에 얼마나 유용한 재료로 쓰였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유전체를 이해하는데 통찰을 제공하게 될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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