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말로만 특검

양민철 2021. 12. 13.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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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철 사회부 기자


통상대로라면 지금쯤 특검 취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주머니에 핫팩을 넣은 채 찬바람을 맞으며 소환 대상자를 기다리고, 파쇄된 서류 조각이라도 찾을까 주변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녔을 터다. 검찰의 대장동 수사에서 온갖 촌극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특검 취재가 얼마 남지 않았다’며 홀로 마음의 준비를 다지기도 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정치권의 특검 논의는 말로만 그치고 있다. 대장동 의혹 수사로 유한기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이 지난 10일 극단적 선택을 하자 여야는 재차 ‘특검 도입’ 주장을 꺼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시늉만 하다 흐지부지될 공산이 크다. 사실 할 거라면 진작에 했을 것이다.

거대 여야 대선 주자를 동시에 수사하는 이른바 ‘쌍특검’은 득보다 실이 더 크다. 정치권은 이를 누구보다 잘 안다. 누구를 특검으로 임명할 것인지, 수사 대상·기간은 어떻게 할지를 두고 여야가 피 터지게 싸우는 동안 선거 날이 코앞으로 다가올 것이다. 특검 구성도 논란거리다.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선 유능한 수사 인력 인선이 불가피하다. 특검에 전현직 검사들이 대거 투입되는 이유다. 이 경우 대선 판세를 검찰이 좌우하는 모양새가 된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런 점을 지적하며 “특검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며 반대 목소리를 냈었다.

문제는 쌍특검이 덜컥 출범해버리는 경우다. 특검 수사는 대선을 둘러싼 정략과 정쟁의 한복판에 놓이게 된다. 한쪽 후보에 대한 수사가 더 진전을 보인다고 가정해 보자. ‘상대 후보 수사는 왜 더딘 것이냐’며 곧바로 공정성 시비가 불거질 것이다. 특정 후보에 불리한 수사 상황이 언론에 보도되기라도 하면 특검은 즉시 피의사실 공표죄로 고소·고발되고, 이를 보도한 기자도 수사 대상에 오를 것이다. 2016년 국정농단 특검법엔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위해 언론 브리핑을 허용하는 조항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기대하기 어렵다. 당시 이 조항 도입에 앞장섰던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이젠 자세를 바꿔 수사기관의 피의사실 공표를 강하게 질타하고 있다. 그래도 언론은 어떻게든 팩트를 취재해 보도할 것이니 쌍특검은 ‘깜깜이 수사’와 ‘흘리기 수사’라는 프레임에 동시에 갇히게 될 것이다.

특검이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한들 신뢰를 얻기도 요원하다. 2007년 17대 대선이 전례다. 당시 검찰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BBK 실소유주 의혹에 대해 “혐의가 없다”는 수사 결과를 대선 2주 전에 내놨다. 이어진 특검마저 이 전 대통령 취임 4일 전 무혐의로 결론지었다. 10년 뒤 같은 사건 수사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번 특검도 어떤 결론을 내든 정무적 판단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독이 든 성배를 받아 들 특검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 특검 논의가 지지부진한 근본 원인은 여론의 무관심이다. 수사 결과가 어떻든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냉소가 사회 전반에 짙게 깔려 있다. 현재 여야 주요 후보에 대한 의혹들은 멀게는 10여년 전부터 제기됐던 사안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30% 넘는 지지율로 박빙 승부를 벌이고 있다. 이른바 ‘알면서도 지지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수사와 재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는 우리 사회가 대선 후보에 대한 검증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방증한다. 정치 권력의 비위를 밝혀내야 할 검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이미 제 기능을 잃었다. 거대 여야 후보는 대선을 80여일 앞두고 극렬 지지층을 독려하며 단두대 매치로 나아가고 있다. ‘이기면 청와대, 지면 구치소’라는 식으로 지지자들의 비이성적 투표를 자극하고 있다. 특검 수사가 진행된다면 “우리 후보 살리려면 찍어야 한다”는 사상 초유의 선거운동이 펼쳐질 수 있다. 정치권이 말로만 특검을 외치는 동안 20대 대선은 제대로 된 후보자 검증도 없이 치러질 판이다. 대가는 오롯이 유권자 몫이다.

양민철 사회부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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