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적 비평자 자임했던 강한섭 전 영진위원장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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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강한섭 서울예대 교수가 10일 오후 별세했다.
강한섭 교수는 1999년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출범하던 때 위원으로 임명돼 10년간 활동하기도 했으며, 2008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돼 1년 2개월 간 재임했다.
영화비평에 열정적이었던 강한섭 교수는 1990년대부터 국내 대표적인 평론가로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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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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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강한섭 서울예대 교수 |
ⓒ 강한섭 |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강한섭 서울예대 교수가 10일 오후 별세했다. 향년 63세.
1958년생인 강한섭 교수는 대학 시절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오가며 영화에 대한 열정을 키운 한국 영화운동 초기 세대였다. 1979년 전양준, 정성일, 안동규, 신철 등과 함께 동서영화연구회에서 활동했고 이후 비평지 <프레임> 동인으로 활동하며 일찍부터 한국영화 비평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80년대 서강대 대학원을 거쳐 프랑스로 유학해 공부했고, 1993년 대종상 본심 심사위원, 1994년 공연윤리심의위원회 영화분야 수입심의위원을 역임했다. 1994년부터 서울예대 영화과 교수로 활동해 왔다.
강한섭 교수는 1999년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출범하던 때 위원으로 임명돼 10년간 활동하기도 했으며, 2008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돼 1년 2개월 간 재임했다.
하지만 영화인 및 영진위 노조와의 갈등과 공공기관 평가에서 영진위가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2009년 스스로 위원장을 사퇴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이후 학문 연구와 평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영화비평에 열정적이었던 강한섭 교수는 1990년대부터 국내 대표적인 평론가로 주목받았다. 영화평론가 강성률 광운대 교수는 "비평가를 지망하던 시절 강한섭 교수의 글을 열심히 읽었다"며 "영화 안으로 파고들기보다는 영화 밖으로 나가서 다시 영화의 길을 찾는 그 모습이 좋았고 방대한 지식과 영화를 이해하려는 치열한 노력에서 많이 배웠으며, 한 번도 어려운 수사학으로 도피하지 않은 것이 좋았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보수학자였지만 대기업독과점 문제에 단호
강한섭 교수는 논쟁적인 비평을 지향해 왔다. 한 편의 영화에 대해 자신과 다른 시각을 존중하면서도 냉철한 상호 비판을 통한 논쟁을 통해 평론의 폭을 넓히려고 애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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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부천영화제 토론회에 참석해 대기업독과점 규제를 강조하던 강한섭 서울예대 교수 |
ⓒ 성하훈 |
보수적인 영화학자였지만 스크린 독과점 문제에서만큼은 남다른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인 대기업 독과점 규제론자로 법적 규제를 통한 대기업의 독과점을 막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기업의 방어 논리에 대해서는 '자본이 앞세운 거짓말'이라고 비판하며 조목조목 반박하는 등 영화산업 대기업독과점 규제에 대한 생각은 단호했다.
2006년 스크린 독과점 문제가 생겨난 이후 대기업 규제에 대해서는 진보정당과도 적극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당시 영화계는 이를 '시장주의와 사회주의의 연대' 또는 '영화계 신국공합작'이라고 평가했다.
영화계 인사들은 "영진위원장으로 재임 당시 안타까움도 있었지만, 198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성장에 비평을 통해 기여한 유능한 학자였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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