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해방 전사가 된 엄친아.. "비거니즘은 살림이다"

김남중 2021. 12. 11.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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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가] 비거니즘 작가 전범선
전범선씨가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앞 서점 풀무질에서 포즈를 취했다. 손에 들고 있는 책은 최근 출간된 전범선의 비거니즘 에세이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이다. 윤성호 기자


전범선은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민족사관고를 졸업하고 미국 다트머스대에서 학사, 영국 옥스포드대에서 석사를 받았다. 국내로 돌아와 2016년 록밴드 ‘전범선과 양반들’을 결성해 3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2017년 국내 최초의 동물해방운동 단체인 ‘동물해방물결’ 창설에 참여했다. 2019년에는 두루미출판사를 설립했고 서울 성균관대 앞 사회과학서점 ‘풀무질’을 인수했다. 2020년에는 동물해방을 내건 계간 잡지 ‘물결’을 창간했다. ‘왜 비건인가?’ ‘비건 세상 만들기’ ‘정면돌파’ 세 권의 책을 번역했고 ‘해방촌의 채식주의자’와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를 썼다. 멤버를 새로 꾸린 밴드 ‘양반들’의 1집 앨범을 조만간 발표한다.

올해 서른이 된 한 청년이 지나온 20대의 이력으로선 지나치게 길고 다채롭다. 예술가 사업가 사회운동가 작가를 겸하는 그의 행보는 ‘비거니즘’(veganism)이라는 키워드로 수렴된다. 친구들이 변호사가 되고 의사가 되는 동안 그는 한국 비거니즘 운동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지난 2일 풀무질 서점에서 마주 앉아 전범선의 이야기를 듣는 데 2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비거니즘은 신선하고 강렬했다. 그는 유학 중이던 대학교 2학년 때 피터 싱어의 책 ‘동물해방’을 읽고 삶의 좌표를 얻었다고 한다.

“동물도 고통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책인데, 간단명료한 논리와 강력한 윤리적 호소에 끌려 들어갔다. 반박해 보려고 노력도 해봤지만 불가능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때부터 점진적으로 채식주의자가 됐고 비거니즘을 알리는 일에 나섰다. 한 권의 책이 사람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은 여전히 진실이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그가 서점을 운영하고 잡지를 만드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비거니즘은 국내에서 흔히 채식주의로 번역되며 음식과 소비 분야에 국한돼 사용됐다. 전범선은 “비거니즘은 페미니즘과 마찬가지로 사상이자 운동”이라며 “비거니즘에 대한 담론이 필요하다고 보고 출판사와 잡지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발간된 ‘물결’ 4호의 특집은 ‘물살이’다. ‘물살이’는 물고기의 대안적 표현이다. 동물을 차별하는 언어를 바꾸고 동물 착취를 은폐하는 언어를 드러내는 게 주요 활동 중 하나다. 동물의 수를 셀 때 ‘마리’ 대신 ‘명’을 사용하고 계란을 ‘닭알’로 우유를 ‘소젖’으로 표기한다. 그는 “비거니즘을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면서 “살림사상, 살림운동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페미니즘은 여성주의라고 번역하는데, 비거니즘을 동물주의나 짐승주의라고 하자니 좀 이상하다. 채식주의라는 말은 너무 좁고. 그러다 ‘살림’이라는 말을 알게 됐고, 그 말에 비거니즘의 본질이 다 들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살림의 반대말이 죽임이기도 하고 살림에는 돌보고 돕고 친구나 가족으로 대한다는 의미도 있으니까.”

그는 “외국에선 비거니즘을 설명할 때 ‘케어’(care·돌봄)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보다 우리 말 살림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며 “살림이라는 키워드로 한국의 비거니즘이 전개된다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역사학을 공부한 그는 “21세기 동물해방이 19세기 노예해방이자 20세기 여성해방”이라며 “비건들이 정치세력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태주의 잡지 ‘녹색평론’이 녹색당 창당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물결’은 동물당 창당을 꿈꾼다.

“해외에는 19개 정도의 동물당이 있다. 한국에도 동물당이 생겨야 한다. 정치를 통해 헌법에 동물권을 보장하고 종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각종 법을 만들어야 한다. 외국에선 공장식 축산 금지, 모피산업 금지, 동물원 해체 등이 속속 이뤄지고 있다.”

전범선과 동물해방물결 회원들은 지난 20대 국회에서 표창원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함께 ‘동물임의도살금지법’을 발의했다. 법 통과를 촉구하기 위해 국회의사당 건물 꼭대기 돔에 ‘개 도살 금지’라는 글자를 빔으로 쏘는 퍼포먼스도 했다.

전범선은 문재인 대통령이 개 식용 금지 검토를 지시하고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개 도살 금지를 공약으로 내건 것은 의미 있는 변화라고 평가했다. 그는 “대선 후보가 동물권을 공약으로 내건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중학교 시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엄친아’ 전범선의 진로는 국제변호사로 정해지는 듯했다. 뉴욕 컬럼비아대 로스쿨 입학 자격도 받아 놓았다. 그 무렵인 2016년 11월 서울 광화문광장의 촛불집회 공연이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만든 밴드 2집에 실린 ‘혁명가’가 주목을 받으면서 무대에 올랐다. 약 15분의 그 날 공연은 전범선의 인생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이었고, 그를 변호사 대신 예술가로 살게 했다.

록밴드의 리더이자 보컬인 그는 한복을 입고 북을 치며 노래한다. 밴드 이름은 ‘양반들’이고, 이번에 새로 내는 음반의 제목은 ‘풍류’다. 한국적인 록을 추구한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며 한국적인 게 외국에서도 통한다는 걸 느꼈다. 그들의 음악을 하되 그들보다 더 멋있게 하고 싶었다”면서 “그러려면 그들과 다른 뭔가가 있어야 했다. 한복을 입고 북을 치고 전봉준을 오마주하고, 그게 내가 그들과 다른 것이고 나다운 것이었다”고 말했다.

전범선은 밴드, 서점, 출판사, 잡지, 단체를 병행하며 산다. 지하에 있는 서점 풀무질 위층에는 동물해방물결이 입주해 있다. 전범선의 민족사관고 동기인 이지연씨가 이 단체 대표다. 서점, 출판사, 잡지, 단체 등이 한 건물에 모임으로써 이곳은 국내 동물해방 운동의 베이스캠프가 됐다.

인터뷰가 있던 날에도 중년 여성들이 서점을 방문했다. ‘매주 월요일 고기 없는 날’을 실천하고 있다는 이들은 전범선을 가운데 두고 “비건”이라고 외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전범선은 “많은 비건이 가족과 갈등을 겪거나 회식 문화에 힘들어하다가 직장을 나오곤 한다”면서 “혼자 외롭게 비건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서점을 찾아와 힘을 얻기도 한다”고 얘기했다.

전범선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라는 책에서 “비건이 된다는 것은 비인간 동물을 착취, 학대, 살상하는 모든 제품을 불매한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비거니즘은 동물권에 대한 각성과 동물해방에 대한 의지에서 나온다. 전범선은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방식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라며 “동물해방은 인간해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닭장 얘기를 꺼냈다.

“고시원이나 오피스텔을 보면 닭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족과 분리돼 서울에서 혼자 유튜브 보며 밥을 먹는다. 뭘 먹는다는 의식도 없이. 닭장 속 닭처럼.”

공장식 양계장에서 닭을 키우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다면 인간이 좁은 공간에서 외롭게 사는 것도 용인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는 “공장식 축산에서 공장식 노동이 나왔고, 동물 살처분이 있었기에 홀로코스트라는 발상이 가능했다”며 “종차별이 사라진다면 인간에 대한 차별도 줄어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범선은 요즘 또 새로운 일을 벌이고 있다. 소 살리기 운동이다. 국내 최초의 소 생추어리(피해 동물 보호소)를 만들기 위해 강원도 인제군과 협의 중이다. 올해 그는 동료들과 함께 인천의 한 목장에서 소 9마리를 구출했다. 시민 모금을 통해 4500만원을 마련해 도축장으로 팔려갈 소를 샀다. 이 소들은 현재 인제군의 한 축산업자에게 보호 위탁을 맡겨 놓은 상태다. 소를 계속 구출해 보금자리에서 키우며 비거니즘 교육장으로 만들 계획이다.

“개나 고양이는 이제 가족이나 반려자로 여겨진다. 소, 돼지, 닭은 아직도 안 그렇다. 그런데 50년 전만 해도 소는 가족이었다. 개는 잡아서 먹는 것이었고.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문화가 바뀌면 금방 바뀔 수 있다. 특히 어린 친구들은 자기가 먹는 고기가 살아있는 동물에서 온다는 걸 모르기도 한다. 소를 직접 보고, 이들이 30년을 살고 죽는 생명체라는 것만 느껴도 고기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본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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