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에 평등하지 않은 '근기법'.. 47년 차별 논란 종지부 찍나

최재필 2021. 12. 11.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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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 미만 사업장 근무 근로자들
강화된 근기법 적용 대상서 제외
빨간날 출근해도 휴일수당 없어
대선 앞두고 노동계의 요구 증폭
시민단체 직장갑질119 회원이 지난해 7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근로기준법 적용 범위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최규현 기자

직장인 A씨는 지난 수년간 사업주로부터 갑질에 시달리다 최근 구두로 당일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해고 사유나 사전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회사를 떠나야 했다. 또 다른 직장인 B씨는 ‘빨간날’에도 빠짐없이 출근해 일했지만 휴일수당을 받지 못했다. 부당한 처우임에도 노동청 신고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두 사람은 모두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처럼 5인 미만 사업장이라는 이유만으로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는 전국에서 38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잘못 꿴 첫 단추

근로기준법은 노동자 근로조건의 최저기준을 처음 명시한 법률이다. 정부는 석유 파동이 한창이던 1974년 1월 14일 경기침체·고용 불안정 등 해소를 목적으로 ‘근로기준법상 벌칙강화’ 내용을 담은 대통령긴급조치를 발동했다. 다만 영세사업장 부담을 덜기 위해 5인 미만 사업장은 강화된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후 1989년에 최저임금, 주휴수당, 퇴직금 등 법 조항 일부만 예외 적용하는 식으로 개정한 것이 전부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은 47년 넘게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온갖 차별을 겪었지만 해당 법의 보호망 밖에 있는 상황이다.

국회입법조사처의 ‘근로기준법 적용 범위 확대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사업장 규모로 근로기준법을 차등 적용하는 해외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근로시간이나 휴가, 해고 제한 등 개별 조항에 예외적으로 차등 적용하는 경우만 일부 존재한다. 독일은 10인 미만 사업장에 해고 제한 규정을 별도로 적용하고, 다른 노동법에는 사업장 규모에 따라 법 적용을 차별하지 않는다. 미국의 공정근로기준법은 개인 또는 기업으로만 적용 범위를 정하고 있고, 일본의 노동기준법도 노동자 수에 따라 법 적용 사업장을 배제하지 않는다.

갈수록 커지는 부작용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기준 5인 미만 사업장 수는 121만개로 전체 사업장(184만개)의 65.7%를 차지했다. 또 올해 8월 경제활동인구조사 근로형태별 취업자 수를 보면 5인 미만 사업장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379만5000명으로 전체 임금노동자(2055만9000명)의 18.5%다. 노동자 5명 중 1명은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셈이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은 근로시간, 연차·생리휴가, 휴일근로 가산수당, 휴업수당, 부당해고 및 직장 내 괴롭힘 등과 관련해 부당한 처우를 받아도 정부·관계기관으로부터 구제받지 못한다. 사업주가 노동자를 해고하기 30일 전에 사전 통보해야 할 의무도 해당되지 않는다. 일부 사업주들은 법적 의무와 책임 회피를 목적으로 사업장을 쪼개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직원 200명이 넘는 한 대형 아울렛이 100개의 사업장으로 쪼개 5인 미만 사업장인 것처럼 위장한 사례도 있었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은 근무환경도 열악하다. 지난해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 882명 중 5인 미만 사업장에서 312명이 사망해 전체 35.4%를 차지했다. 내년에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지만 5인 미만 사업장은 적용 대상이 아니다. 또 지난해 5인 미만 사업장의 정규직 대졸 초임 평균 연봉은 2611만원으로 집계됐는데, 이는 국내 300인 이상 사업체의 정규직 대졸 신입 근로자가 받는 평균 연봉(5084만원)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정부가 대체공휴일을 발표할 때도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에겐 ‘그림의 떡’일 뿐이다.

또 올해 들어 7월까지 임금체불이 발생한 5만9211개 사업장 중 5인 미만 사업장이 3만4961개로 59.0%를 차지했다. 500인 이상 대기업(305개)과 비교하면 114배나 많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올해 1분기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했더니 5인 미만 사업장에서 괴롭힘을 경험한 비율은 36.0%로, 전체 직장인 경험 비율(32.5%)보다 높게 나오기도 했다.


악순환의 고리 끊어야 할 때

대선을 앞두고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에 대한 노동계의 요구가 커지면서 국회와 정부도 이 문제에 관심을 두고 들여다보는 분위기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10일 “5인 미만 사업장의 근로기준법 적용은 차기 정권 초반부터 빠르게 검토가 되고 사회적 대화도 이뤄질 것으로 본다”며 “다만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치열한 논쟁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했다. 5인 미만 사업장의 괴롭힘 실태 등을 조사한 정부 연구용역도 최근 마무리됐다.

국회에는 모든 사업장에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개정안 6건이 계류 중이다. 모두 여당에서 발의했다. 근로기준법 개정에 미온적이었던 야당도 최근 들어 달라진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난달 한 정책토론회에 참석한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환경노동위원회 야당 간사)은 “5인 미만 사업장의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은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고 발언했다.

곽이경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미조직전략조직실장은 “5인 미만 사업장은 병·의원, 변호사·세무사 사무실 등 영세 사업장이 아닌 곳도 상당히 많다”며 “고용노동부가 의지만 있다면 부당해고 구제 신청 등을 시행령으로 충분히 열어 둘 수 있으므로 국회 입법만 바라보는 태도는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국회에서 고용부 법안심사 소위가 5개월 만에 열렸는데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안건으로 상정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고 했다.

세종=최재필 기자 jpcho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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