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 과감히 건드렸다.."서울의 미래" NYT가 주목한 이곳 [한은화의 공간탐구생활]

한은화 2021. 12. 10.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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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문 연 서울 양천구 신정동 양천공원 책 쉼터. 공원의 오래된 나무를 베지 않고 그대로 품은 채 지었다. [사진 서로아키텍츠]

‘토지약탈형 건축’.

공원ㆍ녹지 분야 전문가들이 건축 공사를 일컬을 때 흔히 쓰는 용어다. 조금 생경한 말이지만 곱씹어 보면 공감이 간다. 자연의 입장에서 건축물은 침입자이자 생태계 파괴자다. 건축하려면 자연을 밀어버려야 하니 자연과 건축은 공존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지난해와 올해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공원에 들어선 두 건축물은 남다르다. 한 곳은 공원에 있던 오래된 거목을 그대로 품은 채 지어졌고, 또 다른 곳은 ‘톰 소여의 모험’에 나오는 나무 오두막처럼 숲을 밀지 않고 지어졌다. 건축물이 돋보이려 하기보다 자연을 배려해 지은 두 건축물에는 공통점이 있다. 새 건물인데 오래전부터 있었던 듯 자연스럽다.

올해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대상과 우수상을 받은 양천공원 책 쉼터와 넘은들 공원 책 쉼터의 이야기다. 이 상은 공공기관이 조성한 공공건축물에 수여하는 최고의 상이다. 두 건물을 설계한 김정임 건축가(서로아키텍츠 공동대표)는 “동네에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좋은 공간이 많이 있다는 건 모두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이고 이를 설계할 기회를 갖게 된 건 건축가에게도 무척 보람된 일”이라고 말했다.

올해 문 연 양천구 신정동 넘은들공원 책 쉼터. 자연을 배려해 공원 끄트머리에 간결하게 지었다. [사진 진효숙 작가]

주변을 돌아보면 공공건축물이 많다. 건축공간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지어진 공공건축물이 6092채, 공사비만 20조가 넘는다. 하지만 잘 지어져서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건물은 손에 꼽을 정도다. 두 쉼터는 어떻게 잘 지어질 수 있었을까.


비 오고 추워도 갈 수 있는 공원


설계에 앞서 어떤 공간을 만들지 기획부터 알맞았다. 동네에 필요한 공간은 무엇인지, 제대로 기획하지 않고 예산부터 따서 일단 짓고 보는 공공 건축물이 많다. 하지만 쓸모없는 건물은 결국 세금 먹는 하마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양천구에 지어진 두 공간의 주요 용도는 책이 있는 쉼터다. 공원 안에 이런 공간을 짓는 것 자체가 일종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날 좋을 때만 가는 공원에서 무더위나 한파, 미세먼지와 상관없이 사시사철 머물 수 있는 공원으로 거듭나자는 시도였다. 특히 양천공원은 조성된 지 35년가량 돼 리모델링이 필요한 차였다. 온수진 양천구 공원녹지과장은 “예전에는 공원에 건물을 짓는 것을 금기시했는데 공원을 리모델링하면서 언제나 이용할 수 있게 작은 규모의 공간을 만들어 서비스해야겠다고 계획했다”고 말했다.

양천공원 책 쉼터의 입구. 오래된 느티나무가 옆에 있어 건물도 이전부터 있었던 듯 자연스럽다. [사진 노경 작가]
땅의 경사를 활용해 계단 좌석을 만들었다. 폴딩도어를 열면 밖과 바로 연결된다. [사진 노경 작가]

마침 서울시 푸른도시국에서 공원 내 ‘책 쉼터’ 조성 사업을 시작하려던 차였다. 책이 공원 내 쉼터의 주요 콘텐트가 된 것은『아날로그의 반격』의 저자 데이비드 색스가 2018년 뉴욕타임스에 쓴 글의 영향이 컸다. 그는 방한했을 때 삼청공원 숲속 도서관에 우연히 들렀다가 감명받고 ‘혁신에 대한 집착을 끝내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한국 서울의 삼청공원 도서관에서 미래를 보았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그는 “숲이 우거진 공원에 있는 소박한 건물 안에서 사람들은 바깥의 나무를 보고,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며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 중 하나이며 최신기술로 가득한 곳인데 도서관이 힐링의 장소로 특별히 설계됐다”고 전했다.

넘은들공원 책 쉼터는 공원의 경관을 지키기 위해 한 층으로 넓게 만들지 않고 기존 땅의 경사를 활용해 건물을 2개 층으로 작게 만들었다. [사진 진효숙 작가]
2000여권의 책이 비치된 넘은들공원 책 쉼터의 내부. [사진 진효숙 작가]

테크놀로지 시대에 진정한 혁신이란 기술 중심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배웠으며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반영한 ‘사람 중심’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테크놀로지 시대에 꿈꾸는 사람 중심의 미래, 양천공원과 넘은들 공원 쉼터는 그렇게 서울시의 1호 책 쉼터 조성 프로젝트가 됐다.


나무를 품은 도서관


두 건물의 설계는 서울시교육청의 꿈을 담은 교실 만들기(꿈담) 총괄 건축가를 역임했던 김정임 소장이 맡았다. 김 소장이 쉼터가 들어설 자리를 살피러 양천공원으로 갔을 때였다. 공사 예정지에 수형이 예쁜 감나무 한 그루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저 나무는 다른 곳으로 이식하지 말고,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한다. 생각은 디자인으로 이어져 결국 건물은 나무를 위해 공간을 내줬다. 감나무를 그대로 두고서 건물의 동남쪽을 동그랗게 파냈다. 북서쪽에도 느티나무를 위해 건물이 자리를 내줬다.
양천공원 책쉼터의 배치도. 나무를 배려해 건물을 동그랗게 파냈다. [사진 서로아키텍츠]
책 쉼터는 나무를 품고, 놀이터와 잔디밭의 선을 수용한 결과 자연스럽게 곡선이 많은 건물이 됐다.[사진 노경 작가]

공간이 오래된 거목을 품은 결과는 놀라웠다. 건물도 나무처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흔히 새 건물 주변에는 갓 심은 어린나무가 있는 풍경과 달라서다. 김 소장은 “나무와 더불어 건물 양쪽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와 유아 잔디밭의 동그란 선형을 따라 건물의 모양을 잡은 결과 지금의 형태가 됐다”며 “기존 자연물과 시설물의 존재를 다 수용한 나머지 자리에 건물을 앉혔고, 그 과정이 참 편안했다”고 전했다.

경사진 땅도 그대로 활용했다. 건물 내부에 자연스럽게 단차가 생겨 공간이 분리됐고, 경사도를 활용해 계단 좌석을 만들었다. 날 좋은 날 폴딩도어를 열면 건물 밖의 유아 잔디밭이 곧장 무대가 된다. 양천구청이 위탁해 책 쉼터의 운영을 맡은 서울그린트러스트의 이우향 국장은 “조용히 책만 읽는 공간이 아니라 생태 탐방, 음악회, 자원봉사자 양성 교육 프로그램 등을 운영해 주민들이 좀 더 주도적으로 공간을 운영할 수 있게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3일 양천공원 책 쉼터를 찾았을 때 내부는 정오의 햇빛으로 환하고 따뜻했다. 만 권의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각자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손녀딸과 함께 책 쉼터에 온 주민 이영희(62)씨는 “손녀딸이 ‘할머니 공원에 책보러 가자’고 말해서 오늘도 왔다”며 “코로나로 집에만 있기가 답답한데 여기는 창도 크고 해도 잘 들어와서 참 좋다”고 말했다. 이런 공간이 동네 곳곳에 있다면 삶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책 쉼터 내부는 사방으로 큰 창이 뚫려 있어 밝고 환하다. [사진 노경 작가]

제대로 된 통계도 없는 공공건축


공공건축물만 잘 지어도 동네와 도시의 획일적인 풍경을 바꿀 수 있다. 건축공간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전국에는 22만2916채의 공공건축물이 있다. 지난 1년간 공공에서 계약한 건축공사 금액은 20조8025억원인데 이마저도 전체 통계가 아니다. 조달청을 통하지 않고 한국주택공사(LH)나 지방도시공사, 공기업 등이 자체적으로 발주하는 공공건축물 관련 통계가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기본적인 통계조차 없는 것이 공공건축의 현주소다.

오랫동안 공공건축의 가격입찰 제도는 문제였다. 잘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싸게 짓겠다고 하는 사람한테 설계와 공사를 맡겼다. 지난해부터 설계비 1억 이상(약 공사비 20억~25억) 규모의 공사는 설계 공모전을 열도록 법이 바뀌면서 연간 1000채 가량 공모전을 통해 지어진다.

양천공원 책 쉼터가 무대가 되어 열린 공원 콘서트. [사진 서울그린트러스트]
양천공원 책 쉼터의 운영을 맡은 서울그린크러스트가 어린이 식물 세밀화 교실을 열고 있는 모습. [사진 서울그린트러스트]

하지만 전체 공사의 80% 넘게는 여전히 가격입찰을 통해 지어지고 있다. 방재성 건축공간연구원 국가공공건축지원센터장은 “공공건축물의 경우 건축 공사 외에 전기ㆍ소방 등과 같은 공사를 모두 분리 발주하게 되어 있어 전체 공사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내년부터 건축통계를 국가통계로 만드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력 있는 팀이 참여하기 힘든 시스템도 문제다. 소규모 공사의 경우 분리 발주 탓에 건축 공사 금액이 더 줄어들어 시공사가 꺼리는 시장이 됐다는 지적이 많다. 또 공사비에 연동해 설계비 요율을 정해놓아 소규모 공사의 경우 설계비가 터무니없이 낮다. 건축가의 희생만 요구하는 상황이다. 김 소장은 “책 쉼터 프로젝트를 할 때 동시에 다른 대형 프로젝트를 맡고 있어 거기서 나온 돈으로 그나마 사무실 운영을 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물론 설계 공모전의 편파 심사와 같이 건축계의 자정이 필요한 문제도 있다. 박인석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은 “동네의 보석 같은 공간이 될 공공건축물을 잘 짓기 위한 공간복지기본법이 발의됐지만, 국회에서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며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말했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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