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자꾸자꾸 새 마음으로

2021. 12. 10.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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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내가 근무하는 건물에는 청소하는 부부가 매일 다녀간다. 그들은 꼼꼼한 것은 물론이고 기운이 활달하다. 건물이 아니라 내가 잠시 몸을 씻은 느낌마저 들 정도다. 한 번은 내가 농담을 건넸다. 복도가 너무 깨끗해 먹을 것이 떨어져도 주워 먹어도 되겠어요, 라고. 그러자 정색한 목소리로 답이 돌아왔다. 사실 그렇다고. 우리는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 청소 작업에 대한 자부심과 일을 완벽하게 하려는 사람의 긍정성이 불러온 웃음이었다.

“청소 노동자는 이 도시를 무탈히 굴러가게 하는 주요한 인물들 중 하나다. 그들은 우리가 돌아서서 금세 잊어버리는 곳을 날마다 치운다. 그들이 다녀간 자리에는 어제의 잔해가 사라지고 내일이 시작될 공간이 생긴다. 그러므로 청소란 우리에게 공간의 미래를 선사하는 노동이다.” 마지막 표현이 이슬아 작가답다. 나는 이 표현을 ‘새 마음으로’에서 읽었다.

이슬아의 노동자 인터뷰집인 ‘새 마음으로’에는 오랫동안 노동하며 산 일곱 어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되고 힘든 노동, 삶의 무게는 그대로인데 그들이 나눈 이야기는 이렇게 산뜻할 수가 없다. 재밌고 경쾌하다. 작가의 섬세한 정리 노동 덕분일 것이다. 이 책이 내게 도착한 과정에도 얼마나 많은 노동자의 동력이 필요한가. 작가의 원고 작성, 인터뷰 현장의 사진 촬영, 교정과 디자인, 인쇄소 기장의 기계 운용, 발주와 납품을 챙기는 경리의 숫자 정리, 책의 운송, 낱낱의 책 배송을 책임지는 배달원의 발품.

책에 실린 응급실 청소 노동자, 농업인, 아파트 청소 노동자 부부, 인쇄소 기장, 인쇄소 경리, 수선집 사장 등 일곱 어른의 삶은 오랜 노동으로 단련됐다. 평범한 듯 털어놓은 그 말들은 삶의 신고 속에서 보석 같은 깨우침이 반짝거려 몇 마디 말만으로도 바로 빨려들었다.

“담담한 것은 없지요. 맨날 봐도 깜짝깜짝 놀라요. 죽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뜨끔해요. 어디서 누가 통곡을 하고 울면 죽은 거예요. 그럼 나도 눈물이 나고 그래요. 죽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아프면 비명을 지르고 앓는 소리를 내죠. 아주 그냥 내 마음이 아파 죽겠어. 일이 있응께 거기다 계속 신경을 쓸 수는 없지만요.” 27년 차 응급실 청소 노동자, ‘이 여사님’로 불리는 이순덕씨는 담담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일상이 담담하고 평온하길 바라지만 응급실 일상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사건과 사고가 일상인 곳에서 묵묵히 더러운 것을 치우는 청소 노동자에게 담담한 것이란 있을 수 없다. 어투가 그대로 살아 있는, 노동자의 고백은 내게 묻는다. 당신이 하는 일은 우리 이웃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누구를 살리고 있는 일인지를. 내가 직접 하지 않는 건물 청소 덕분에 나는 새롭게 정리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그 노동의 혜택을 누린다. 내가 만든 책은 누군가에게 어떤 혜택으로 주어지는 것일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새 마음으로’에는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는 농업인 윤인숙씨의 오이 농사 이야기도 나온다. “오이는 내가 돌보고 싶을 때 돌보는 기 아이라. 오이 상태를 보고 야가 뭔가 부족하다 싶으면 그때그때 잘 챙겨줘야 돼요.” 경상도 사투리에 실린 농사 철학에는 깊은 뜻이 있다. 일하는 사람의 태도다.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일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로 일하는 농업인의 말에서 나는 한 해의 끝에 아름다운 경구를 발견했다.

“감정이 올라올 때도 있지만 빨리빨리 잊어버리려고 해. 스트레스를 안고 꿍해 있으면 나 자신이 너무 상해버리잖아. 새 마음을 먹는 거지. 자꾸자꾸 새 마음으로 하는 거야.” 그렇다. 나 자신이 상해지기를 원하지 않으면 새 마음을 먹어야 한다. 그것도 자꾸자꾸 마음먹어야 한다.

우리는 노동으로 연결된다. 당신의 노동이 내 노동을 추동한다. 내가 하는 노동으로 나 자신이 만들어졌고 만들어져간다. 이 사실을 삶의 무게 탓에 자주 잊었다. 직접 만나지 못한 노동자들의 ‘새 마음’을 책에서 발견하고 마음 다진 것이 다행이다. 연말에 책에서 받은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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