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신군부세력에 저항했던 칠순 목사, 40년만에 억울함 벗어

신진호 입력 2021. 12. 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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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전두환 신군부세력 탄압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던 칠순의 목사가 40년 만에 억울함을 풀게 됐다.

1980년대 초 신군부세력에 저항해 고초를 겪은 김규복 전 목사(오른쪽 셋째)가 9일 재심을 통해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소감을 밝히고 있다. 신진호 기자

대전지법 형사8단독(차주희 부장판사)는 ‘계엄법·계엄포고문 위반죄’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던 김규복(69) 전 대전빈들교회 목사에 대한 재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그동안 계엄법 위반 혐의 등으로 처벌받은 피해자들이 5·18 특별법에 따라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한 뒤 재심이 열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재판부 "저항은 헌법 수호를 위한 정당 행위"


차주희 부장판사는 “전두환 등이 일으킨 12.12는 국가내란행위로 헌법질서를 파괴한 것으로 이에 대한 저항은 (5.18) 특별법에 따라 무죄에 해당한다”며 “(피고인의 행위는) 헌법 수호자인 국민으로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정당 행위였다”며 무죄 선고 이유를 밝혔다.

차 부장판사는 선고 직후 김 목사에게 “그동안 수고 많으셨다. 조심히 돌아가시라”고 말했다.

1987년 6월 23일 연세대 학생들이 호헌철폐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앙포토]


김 목사는 1971년 연세대에 입학, 군부독재에 저항한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복학생이던 1980년 5월에는 연세대 학생 1000여 명이 서울 신촌로터리~신촌역에서 열린 시위에 참여했다. 김 목사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발령된 계엄령 수배 명단 329명에 포함되기도 했다.


국법회의 "시위 논의" 김 목사에 집행유예 3년 선고


그는 1980년 6월 반정부 도심 시위를 논의했다는 이유 등으로 체포돼 1981년 수도경비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계엄법·계엄포고문 위반죄’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김규복 목사는 고초를 겪은 뒤 대전신학대학교와 장로교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대전시 대덕구 대화공단(현 1·2 산업단지)에 빈들장로교회를 개척한 뒤 활동하다 은퇴했다.

1980년대 초 신군부세력에 저항해 고초를 겪은 김규복 목사(꽃다발을 든 남성)가 9일 재심을 통해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소감을 밝히고 있다. 신진호 기자

김 목사에 대한 재심은 올해 3월 대전지검이 법원에 직접 청구하면서 이뤄졌다. 검찰은 5·18 당시 선포된 계엄령에 대해 대법원이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는 범죄’로 규정한 것을 근거로 재심을 청구했다. 당시 차주희 부장판사는 “김 목사의 경우 헌정질서 파괴범죄를 저지하려는 행위였던 만큼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른 재심 사유에 해당한다”며 검찰의 청구를 받아들였다.


김 목사 "5.18 정신으로 부끄럼 없이 살아와"


김규복 목사는 법원의 선고 직후 지인들에게 꽃다발을 받고 잠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취재진에 “그동안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으로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다”며 “함께 해준 동지와 시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신진호 기자 shin.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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