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의 컬처 아이] 전시 도록이 사라져선 안 되는 이유

손영옥 2021. 12. 9.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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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에서 이번 개인전 도록을 내지 않아요. 전시 비평을 꼭 받고 싶었는데….” 서울 종로구 삼청동 A화랑에서 개인전을 연 B작가가 이런 넋두리를 했다. 5년 만에 연 전시라 미술계 특히 미술평론가들이 어떻게 봐줄지 몹시 궁금했던 터였지만 말이다. 화랑 측은 전속 작가인데도 전시에 실과 바늘처럼 따라붙는 도록은 내지 않았다.

도록은 전시 작품, 전시 전경 사진과 함께 평론가의 전시 서문, 작가론 등 비평 글로 구성이 된다. 그런데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안내서인 도록이 화랑가에서 슬슬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규모가 작은 화랑이야 그렇다 치고 홍콩 바젤 아트페어에 나갈 수준의 메이저 화랑에서 이런 일이 생기니 우려스럽다. 홍콩 바젤은 아트페어 참여 자격 심사가 깐깐하기로 유명하다. 미술품 중개자로서의 역량뿐 아니라 작가를 발굴하고 키우는 기획자로서의 역량까지 보기 때문이다. A화랑과 마찬가지로 홍콩 바젤에 나갔던 P화랑도 “꼭 필요한 경우 아니면 도록 제작을 안 한 지 오래됐다”고 말했다. A화랑 관계자는 “원로 작가 전시나 회고전 성격일 땐 도록을 만들지만 젊은 작가의 경우는 도록 제작이 비용 대비 효과가 적다. 그 비용으로 동영상을 제작해 유튜브 등에 유포하는 게 작가를 알리는 데 더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 B작가의 경우도 작품 제작 과정을 직접 설명하는 7분짜리 동영상 제작이 지원됐다.

B작가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보다 훨씬 ‘센 작가’인 설치미술가 이불도 최근 개인전을 마쳤지만 도록 제작을 지원받지 못했다. 이불은 서도호와 함께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는 한국 작가다. 그런 그도 전속 화랑을 옮겨 6년 만에 개인전을 열었고, 전시에서는 그동안의 설치미술에서 벗어나 회화 작업을 새롭게 선보였지만 도록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동영상이 트렌드”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하지만 홍보 동영상은 전시 도록의 보완재여야지 대체재가 돼선 안 된다. 겨우 7분짜리 분량 안에 작가가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은 홍보 수단은 될지언정 그 작가를 동시대 미술의 맥락 속에 자리매김시키는 비평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록은 그 자체가 기록이다. 그것이 쌓여 역사가 된다. 미술평론가 겸 전시기획자 이상윤씨는 “지금은 그 파장을 충분히 체감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게 트렌드가 돼 도록이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 큰 문제가 된다. 한 시대 미술사가 통째 증발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전시한 지 3, 4년만 지나도 그 공간에 어떻게 설치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럴 때 도록은 좋은 참고 자료가 되는데…”라고 토로했다.

미술평론가 최열씨도 “도록은 한 작가가 그 시점에 대중과 어떻게 만났는지 보여주는 공신력의 징표다. ‘싸구려 화랑’이 아니라면 화랑은 최소한 공공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전시는 화랑과 작가가 뜻이 맞아서 하는 거 아니냐. 당연히 도록 제작을 해야 한다. 작가의 급이 높고 낮고의 기준이 어디 있나. 중진 작가가 시간이 흘러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가 됐을 때 과거에 전시한 도록의 부재는 작가를 세계적으로 알리거나 미술사를 서술하는데도 어려움을 초래한다”고 강조했다. 또 위작 문제가 발생했을 때 도록은 진위를 가려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도록은 비용만으로 따질 수 없는 권위가 있다.

홍보만 있고 비평을 경시하는 문화는 최근의 미술시장 과열과 맞물려 있는 거 같다. MZ세대가 시장에 뛰어들면서 이들이 선호하는 동영상 홍보로 대체하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하지만 MZ세대가 아무리 비트코인으로 번 돈을 싸들고 와도 장기적으로 개별 작가를 움직이는 힘은 대중이 아니라 비평에 있다. 옥석을 가리는 일은 전문가인 비평가의 몫이다. 비용이 문제라면 종이값을 절약할 수 있는 온라인 도록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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