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의 퍼스펙티브] 책임 저버린 정치, 폭발력 커지는 연금 뇌관

이현상 2021. 12. 9.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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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정부로 넘어간 연금 개혁 과제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정치는 수(數)고 수는 힘, 힘은 돈이다.”

일본 정치의 전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가 했다는 말이다. 막후 정치의 승리 공식을 설파한 이 말은 연금 문제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현재 우리나라 1·2차 베이비붐 세대(1차 1955년생~63년생, 2차 1964년생~74년생)는 1600만명 남짓. 총인구의 31%다. 앞으로 20년 가까이 매년 70만~90만명이 법적 ‘노인’ 대열에 합류한다. 20·30대(20~39세)의 인구 비중 25%를 압도한다. 세대별로 이익이 갈리는 문제를 표로 결정한다면 베이비 부머들이 유리할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국민연금 수익비 2.2 … 지속성 의문
청년 25% “기금 고갈로 노후 불안”
유력 주자들은 ‘전략적 침묵’ 모드
대선판 세대 갈등 불씨 될 공산 커

지금의 연금 구조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개혁 시도는 시시포스의 헛수고처럼 제자리를 맴돌았다. 표가 안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도 이익의 보호벽을 허물라면 주저할 수밖에 없다. 힘겹게 산업화·민주화 시대를 헤쳐온 이들의 형편도 녹록지 않다. 갈등 조정자로서 정치의 역할을 기대하지만, 성과는 언제나 기대를 밑돌았다. 문재인 정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시도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지지율 때문이다. 20대 대선에 나선 유력 주자들도 다를 바 없다.

청년 위한다는 ‘립 서비스’만 요란

이현상의 퍼스펙티브

“청년이 희망을 꿈꿀 수 없는 나라는 미래에 희망을 말할 수 없다”(이재명 민주당 후보). “청년은 정책 수혜자를 넘어 국정 파트너이자 정책 기획자가 될 것”(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유력 대선 주자들의 청년층을 향한 구애는 요란하다. 내용은 달콤한 현금 지원 공약이다. “임기 내 19~29세 청년에게 연 200만원을 지역 화폐로 주겠다”(이 후보의 청년기본소득), “취약 계층 청년들의 구직 활동 지원을 위해 월 50만원을 최장 8개월 지급하겠다”(윤 후보의 청년도약보장금).

하지만 세대 간 갈등의 최전선에 있는 연금 개혁 문제에 대해서는 짐짓 고개를 돌린다. 이 후보는 “연금 개혁도 언젠간 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 로드맵을 만든다고 실현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오히려 일산대교 통행료 무료화로 국민연금 수익 기반을 허문다는 비판까지 받았다. 윤 후보도 “연금 개혁 같은 문제는 어느 한 정파만 추진해선 해결할 수 없다”며 앞서 총대 멜 생각이 없음을 내비쳤다.

결국 연금개혁 문제는 1, 2위 주자와 차별화를 꾀해야 하는 군소 정당 후보들의 전유물이 됐다. 3개 특수 직역 연금(공무원·사학·군인)의 설계 기준을 국민연금 수준으로 맞추자는 ‘동일연금제’를 들고나온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대표적이다. 김동연 새로운물결 후보도 4대 공적 연금의 패키지 개혁을 주장한다. 이들은 “연금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지지도가 받쳐주지 않는다면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그대로 뒀다간 국가 파국” 경고도

국민연금 재정수지 전망

국민연금은 2042년 적자로 돌아선다. 거두는 돈보다 내주는 돈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1778조원까지 쌓이는 적립액은 차츰 줄어들어 2057년에는 바닥이 드러나게 돼 있다(2018년 제4차 국민연금 재정 추계). 2019년 나온 국회예산정책처의 적자 및 고갈 추정 시점은 이보다 더 비관적이다. 적자 시점은 2년, 고갈 시점은 3년 더 당겨졌다. 적립금이 바닥나면 그때부터는 현역 근로 세대의 급여를 곧바로 은퇴 세대의 연금으로 사용해야 한다. ‘적립식’에서 ‘부과식’으로 전환된다. 저출산·고령화를 고려하면 미래 근로 세대의 보험료 부담은 소득의 30%를 넘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윤석명 한국연금학회장은 “그런 지경까지 상황이 방치되면 보험료를 부담하는 젊은 세대나 연금 삭감을 당하는 노령 세대 모두 거리로 나서고, 국가는 파국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4대 연금 중 나머지 3개 직역 연금도 손질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다. 국회예산정책처의 ‘2021~2030년 중기재정전망’에 따르면 2030년까지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 적자는 각각 9조6000억원과 4조1000억원으로 불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두 연금의 앞으로 10년간 누적 적자는 합쳐서 100조원 가까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법에 따라 이 적자 폭은 일반 국민이 낸 세금으로 고스란히 메워야 한다.

보험료율(납입액)을 높이거나 소득대체율(지급액)을 낮추는 방향의 개혁은 이런 예정된 파산을 조금이라도 늦추자는 고육책이다. 시간을 벌어 미래 세대가 대처할 여유를 마련해주자는 것이다. 그사이 인구 구조가 안정화할 수도 있고,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성 세대가 양보하는 수밖에 없다. 그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 정치의 책무인데도 표가 급한 정치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

문, 공적 연금 손대지 않은 유일한 정부

연금 개혁은 정치인으로서는 판도라의 상자다. 함부로 열었다간 태양 가까이 날아올랐다 날개가 녹은 이카로스마냥 추락한다. 노동 유연화와 연금 개혁을 밀어붙이다 실각한 독일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은퇴 연령을 60세에서 62세로 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재선에서는 패배한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 등이 그 예들이다. 임기 초부터 의욕적으로 연금 개혁을 추진해온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내년 재선 도전을 앞두고 정치적 부담을 느껴 ‘논의 유보’를 선언한 상태다.

문재인 정부는 일찌감치 이 부담스러운 일에서 손을 털어 버렸다. 2018년 4차 국민연금 재정 추계를 계기로 위기론이 빗발치자 마지 못해 ‘4지 선다형’ 개혁안을 국회에 제출하고는 공을 넘겨 버렸다. 청와대의 의지가 없는데 표에 민감한 의원들이 나설 리 없다. 올해 들어 지지율에 연연할 필요 없는 임기 말이 개혁 적기라는 지적이 나왔지만, 숙제는 결국 차기 정부의 몫이 되고 말았다.

역대 정권은 그래도 공적 연금에 크고 작은 메스를 갖다 댔다. 여론과 이해 집단의 강력한 반발도 감수했다. 김영삼 정부의 1차 공무원연금 개혁, 김대중 정부의 1차 국민연금 개혁 및 2차 공무원연금 개혁, 노무현 정부의 2차 국민연금 개혁,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3·4차 공무원연금 개혁이 그런 과정들이다. 미흡하긴 했지만 그나마 이런 노력 끝에 초기 5.5%의 공무원연금 보험료율은 지금 18%대로, 3%인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9%로 올랐다. 임기가 5개월 남은 문재인 정부가 이제 와서 연금 개혁에 나설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그렇게 되면 현 정부는 국민연금 제도가 만들어진 이후 공적 연금에 손대지 않은 유일한 정부가 된다.

‘세대 갈등’ 뒤엔 연금 불안감 도사려

연금 문제는 결국 세대 간 불공정의 문제다. 최근 기대여명을 반영하면 국민연금 수익비는 2.2다. 납부 총액보다 받는 총액이 두 배가 넘는다는 이야기다. 시간이 갈수록 적자가 쌓일 수밖에 없다. 현재 세대에 유리하고, 미래 세대에 불리한 구조다. 노무현 정부 시절 연금 개혁을 주도했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적게 내고 많이 받는 연금 구조는 진보·보수를 떠나 ‘나쁜’ 제도다. 후세대를 착취하는 연금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상태로라면 1990년대 이후 출생 세대는 노동시장에 남아 있는 내내 윗세대의 연금을 감당하다가 자신들이 은퇴하는 순간에는 연금이 소진될 위기에 처하고 만다(이철승 서강대 교수, 『불평등의 세대』). 이 교수는 “386세대가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과잉 점유 중”이라며 “이의 해결을 위해서는 386세대의 ‘2차 희생’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민주화를 위한 희생이 1차 희생이었다면 청년 세대에 대한 양보가 2차 희생이라는 것이다.

청년 세대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루하루를 헤쳐가기도 힘든데 웬 노후 걱정”하던 태도에 변화의 기미가 보인다. 최근 한국경제연구원 조사에서는 19~34세 청년의 4분의 1이 연기금 고갈에 따른 노후 불안을 우려했다. 젊은 직장인들은 월급에서 꼬박꼬박 떼는 연금 보험료가 과연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을지를 의심쩍어한다. 과거 대선이 ‘지역 대결’과 ‘이념 대결’이었다면 내년 대선은 ‘세대 대결’이 될 것이라는 관측에는 이런 청년의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다.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40%에서 50%로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TV 토론에서 재원 대책 질문에는 “설계만 잘하면 보험료율 인상 없이도 가능하다”는 모호한 답만 내놓았다. 현 정부가 보여준 연금 개혁 방기(放棄)의 출발점으로 기억될만한 장면이다. 이런 장면이 이번 대선 TV 토론에서도 반복된다면 청년 세대들의 절망과 분노는 달랠 길 없어진다.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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