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련히 알아서 주겠지? 급여명세서에서 꼭 확인할 것 [노동의 종말]
노동의 가치가 퇴색하는 세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급격한 자동화로 인간의 노동 그 자체가 종말을 고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마주했던 노동 현실의 민낯을 보며 현장의 관찰자이자 조율자로서 신입 노무사가 보고 겪고 느낀 것들을 독자와 공유합니다. <편집자말>
[박한울 기자]
누군가 당신에게 노동자로서의 자기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라고 한다면 뭐라 답하겠는가? 십중팔구는 자신이 받는 임금의 총액을 말할 것이다. 만약 연봉이 1억이 넘는다고 하면 "괜찮은 직업을 가졌나 보다"라는 생각을 하고, '국민 연봉'인 3천만 원을 받는다고 하면 "그냥저냥 한 소시민인가 보다"라는 가치평가도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사람들은 통상 어떠한 노동의 가치를 '임금 총액'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총액이 꼭 모든 걸 말해주지는 않는다. 같은 기간에 수입 자체는 같더라도 실제로 일한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노동의 '가성비'는 달리 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언뜻 당연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시급제 노동자가 아닌 통상의 연봉제(또는 월급제) 노동자들은 자신이 제공하는 노동의 가치가 어느 수준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저 어림잡아 어느 정도 수준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냉혹한 세상에서, 자신이 어떤 명목으로 얼마만큼의 급여를 받는지 파악하는 일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사장님이 어련히 알아서 주겠거니" 하며 의심 없이 받아 왔던 임금이 사실은 법적 최저임금에 하회한다거나, 별도로 지급되어야 할 각종 수당이 소위 '임금 쪼개기' 상태로 포함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임금명세서 교부의무의 개요
이에 우리 법제는 지난 2021년 11월 19일 자로 근로기준법 및 그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그동안 강제성 없는 단순한 훈시 규정으로 적용되어 오던 임금명세서 교부를 의무화하면서 미교부시 노동자 1인당 최대 100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할 근거를 마련하였다.
임금명세서에는 개별 노동자의 임금을 결정하는 정보가 들어 있다. 핵심은 임금총액과 함께 단위 근로시간을 적는 데 있다. 만약 근로계약서에서 정한 기본 근로시간인 '소정근로시간'을 초과하여 일했다면, 당해 노동자의 연장·야간 및 휴일근로시간과 그에 따른 가산임금이 각각 얼마인지를 적게 된다. 여기에서 소득세나 4대 보험 등 공제액을 제한 실지급 금액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후 급여'가 되며, 사용자는 이러한 사항을 적은 서면(전자문서 포함)을 임금 지급 시에 개별 노동자에게 교부하여야 한다.
비록 상당수의 사업장에서 업무량 증가 등 여러 이유를 들면서 볼멘소리를 하고 있지만, 임금명세서는 우리가 받게 되는 임금이 어떠한 방법으로 산정되는지를 볼 수 있는 정확한 자료로서 그 의의가 크다. 실제로 근태관리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소규모 사업장들까지도 임금명세서 작성 문의를 하는 것을 보면, 적어도 임금의 투명성과 공정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번 법 개정이 가지는 의의가 크다.
하지만 실무자의 입장에서 본 이번 법규 개정은 그 이론적인 의의만을 기리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단순히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기에는, 그 과정에서 발생한 몇몇 이슈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총 근로일수와 근로시간은 왜 빠졌을까
지난 2021년 7월 29일, 고용노동부는 '근로기준법 시행령·시행규칙 일부개정령안 입법예고'라는 제목의 보도자료 및 첨부자료를 통하여 임금명세서의 필수기재사항을 알리며 의견청취를 시작하였다.
▲ 임금명세서 작성례 위 작성례는 근로기준법 시행규칙 별지 제17호의2 서식으로 입법예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삭제됨. |
ⓒ 고용노동부 |
문제는 고용노동부에서 근로일수나 근로시간 산정에 대한 명확한 해석이나 지침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는 점에 있었다. 두 항목 모두 실제 근로일수 및 실근로시간에 기반한다는 정도의 기초적인 지침만이 있었을 뿐, 여기에 유급주휴일의 시간이나 연차유급휴가를 사용한 근로일의 시간은 표기해야 할지 혹은 제외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을 정하지 않고 있었다.
현실적인 문제도 많았다. 애초에 영세사업장의 경우 근로시간을 정확하게 기록하여 관리하는 경우도 드물 뿐만 아니라, 일정한 연장·야간 및 휴일근로에 대한 수당을 미리 지급하는 이른바 '포괄임금제'를 시행하는 경우도 많아 실제 지급되는 급여액과 실근로시간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위와 같은 '애매한 지침'에 대해 답을 주지 않던 고용노동부는 시행일을 겨우 3일 남긴 지난 11월 16일 안내자료를 내고 "현실과 타협한 지침"을 내리기에 이른다. 기대 반 긴장 반의 마음으로 열어본 자료에서는 '총 근로일수'와 '총 근로시간'이 빠져 있었고, 결과적으로 실근로시간에 기반한 임금의 산정이라는 법의 취지가 반감되고 말았다.
이뿐만 아니다. 위 안내자료에서 고용노동부는 "기본급이나 정액으로 지급되는 수당 등에 대해서는 계산방법을 별도로 작성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내하고 있다. 이는 포괄임금제 적용 사업장에서 실제 연장근로 여부와 무관하게 일정액을 지급하는 '고정 연장·야간 및 휴일근로수당' 또한 산정방식을 적지 않아도 된다는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예를 들어, 고정 수당을 지급하는 사업장이 최저임금법 등 규제를 피해 가려는 의도로 임금 총액의 조정 대신 ① 휴게시간을 늘리고 소정근로시간만을 줄이거나 ② 직전연도의 고정 연장근로시간만을 수정하는 등 탈법적인 방식을 취한다면, 임금 산식을 알 수 없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근로조건이 불리하게 변경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기 어렵게 된다.
물론 근로계약서에도 임금의 구성항목 및 계산방법 등을 필수적으로 기재하도록 정해두고 있다. 하지만 다수 사업장에서 입사 당시에만 계약서를 작성하고 이후의 급여액 변동에 대해서는 구두 합의하는 경우가 많기에, 당장 계좌에 찍힌 자신의 임금 내역을 확인할 유일한 방법은 임금명세서뿐이므로 그 계산식을 생략할 수 있도록 타협한 이번 결정은 현실과 과도하게 타협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이외에도 이번 임금명세서 교부의무는 1인 이상 노동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장에 적용되었기 때문에, 매일 인원이 변동되는 일용직 노동자 등 비전형적 노동자의 경우에도 원칙적으로 그 임금지급일에 명세서를 교부하여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수 사업장에서 월중 일용직 근로자의 급여일을 특정일로 정해 일괄 지급하고 있어 정작 임금지급일에는 고용관계가 종료된 경우가 많아, 자칫 사용자들이 임금명세서 교부를 소홀히 하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모든 노동이 투명하게 평가되기를
단점만을 나열하다 보니 허점투성이인 법제 같기도 하지만, 여전히 임금명세서 교부의무를 시행한 이번 법 개정의 의의는 매우 크다. 특히 온갖 수당 명목으로 임금 총액을 쪼개는 관행이 일상화된 지금, 장기적으로 임금명세서 교부의무만으로도 수당의 단순화를 이룰 수 있다는 기대감도 크다.
▲ '임금명세서 만들기' 프로그램 고용노동부는 11.19. 개정 근로기준법에 따른 영세사업장의 임금명세서 교부를 촉진하고자 작성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
ⓒ 박한울 |
정부는 의무 위반에 대하여 당장 처벌하기보다는 충분한 시정 기간(법 위반을 인지한 날로부터 25일 이내)을 두고 제도 자체가 정착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기왕 긴 호흡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위에서 지적한 실무적 이슈에 대한 후속 지침까지도 마련하여 우리 노동의 대가가 투명하고 공정하게 결정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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